나의 이야기

한국일보 장재구 회장께(2013년 6월 19일)

divicom 2013. 6. 19. 12:14

장재구 회장님,


'안녕하세요?'하려다 보니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런 인사는 헛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저는 한국일보 견습기자 33기 김 흥숙입니다. 돌아가신 당신의 아버님, 장기영 회장님이 마지막으로 선발한 13명의 견습기자 중 한 명입니다. 1차와 2차 필기와 면접시험에 합격한 후 10층 그분의 방에서 최종 면접을 치렀습니다. 


'면접'이라고는 하나 일방적이거나 고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상업고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부총리를 역임하시고 당시 이 나라 제일의 신문사를 만드신 장기영 회장님은 신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분이었습니다. 최종 면접자 스무 명 중 열세 명이 합격했고 제가 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참 기뻤습니다. 취직을 해서 기쁜 것보다는 그분처럼 신문을 '사회의 목탁'으로 믿고 사랑하시는 분과 한 식구가 되었다는 게 기뻤던 것이지요.


그때 한국일보사에서는 일곱 개의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저는 영문학을 전공한 터라 자연스럽게 영자신문(The Korea Times)에 지원했고, 코리아타임스와 한국일보에서 견습기간을 보낸 후 코리아타임스 사회부에 배치되었습니다. 12년 만에 '기자로서는 인정받지만 인간으로서는 악화되었다'는 각성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곳, 중학동 14번지는 밤낮으로 저를 키워 주었습니다. 그곳에서의 12년 동안, 저는 한 번도 경영진이나 권력을 의식해 기사를 쓴 적이 없습니다. 선배들은 엄격한 스승과 같았지만 밥은 늘 그분들이 사 주셨습니다. 후배들에게 밥 사는 제 습관은 그때 선배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장기영 회장님은 불시에 편집국에 들르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점퍼 차림으로 불쑥 들르셨다가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에 야근 기자들을 끌고 설렁탕집으로 가 밥을 먹이곤 하셨습니다. 한국일보사의 월급이 다른 회사보다 적다는 말이 돌았지만 저도 제 동료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장기영 회장님은 닮고 싶은 '기자'였으니까요.


그런 분이니 한국언론사에 숱하게 많은 '처음'을 기록하신 게 놀랍지 않습니다. 브리태니카 백과서전을 보니, 한국일보는 1954년 7월 제1기 견습기자를 모집하여 한국신문계에 처음으로 기자공채제도를 도입하고, 1962년 11월 28일엔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공화당을 창당하는 것에 대한 비판기사를 실었다가 장기영·홍유선·김자환이 구속되고 3일간 근신휴간했다고 합니다. 1972년 10월 24일 편집국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면서 1970년대 자유언론운동을 촉발했으며, 1976년에는 국내 언론계 최초로 기자해외연수제도를 실시했고, 1979년 10월 9일 국내 최초로 한글 자동문선(自動文選) 및 자동식자 컴퓨터 시스템을 완성했습니다. 한국일보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스포츠신문(일간스포츠)과 어린이신문(소년 한국)을 발행하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독립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를 발행했습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한국일보가 비틀거리기 시작한 건 1980년전두환 정권이 취한 언론통폐합조치로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이 폐간당하고, 5공화국 요직에 조선일보 사람들이 진출하여 조선일보를 키우면서부터였겠지요. 장기영 회장님의 빠른 별세(1977년)와 그분에게서 '신문 사랑'을 이어받은 맏아들 장강재 회장의 이른 죽음(49세, 1993년)도 한국일보사를 어렵게 했을 겁니다.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코리아타임스를 다른 회사에 팔 거라는 소문 속에서 노조원들과 장강재 회장을 뵈었을 때 "코리아타임스는 아버지가 사랑하시던 신문입니다. 내가 그 신문을 어떻게 팝니까? 나도 아버지만큼 코리아타임스를 사랑합니다'하시던 게 눈에 선합니다.


때로 시절이 수상할 때는 한국일보의 노조와 경영진이 맞서기도 했지만 둘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언제나 기자로 사셨던 장기영 회장의 '기자 정신'이 결국엔 둘을 하나로 묶어 주곤 했으니까요. 장강재 회장 돌아가시고 바로 아래 동생인 당신이 회장이 되었을 때 저는 참으로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당신은 형보다 훨씬 아버지를 닮은 외모를 가진 터라 당신의 '신문 사랑'도 아버지 같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지난 4월 노조가 당신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당신이 2002년부터 경영권을 행사하며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당신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으니 회장 자격이 없다는 게 노조의 주장입니다경영난 때문에 중학동 사옥을 매각하며 거기에 새로 들어설 건물 일부를 140억원에 우선 매수한다고 건설사와 계약했으나, 당신이 건설사에서 빌린 증자 대금 200억원을 우선매수권과 맞바꿨다지요?

 

노조의 고발에 분노한 당신은  20여명의 외부 용역을 동원해 기자들을 내쫓고 편집국을 폐쇄했습니다. 

우리 집에 배달되어오는 한국일보는 이제 한국일보가 아닙니다. '연합뉴스의 신문판'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 한국일보는 당신에게 동조하는 편집국 간부와 기자 10여명이 제작한다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어젠 한국일보 구독을 중단하려 보급소에 전화를 했지만 결국 중단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의 형, 두 사람의 눈빛이 떠올라서입니다.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쏟아내지 못했던 그들의 '신문 사랑'이 행여 당신 속 어딘가에 남아있을지 모릅니다. 부디 정신을 차리세요! 돈... 욕심에 눈이 멀어 실수했다고 인정하세요. 편집국 문을 열어 복도에서 신문을 그리워하는 기자들을 들어가게 하세요. 당신의 아버지와 형처럼,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당신의 묘비명이 '한국일보를 죽인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