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TBS '즐거운 산책' 시간에는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을 읽어드렸습니다. 이 시는 같은 제목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집은 1981년 9월에 처음 나왔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86년 4월에 나온 8쇄입니다. 일 년에 1쇄 이상 찍어냈다는 거지요. 우리 국민이 이렇게 시를 열심히 읽던 때가 있었습니다.
80년대, 그 지독한 독재와 싸우면서도 우리는 시를 읽었습니다. 상처를 덮는 반창고 같은 ‘힐링’ 책들보다, 상처를 응시하며 그 뿌리를 찾는 시들을 읽은 겁니다. 그때는 인터넷서점이 아닌 진짜 서점을 찾아가 책 냄새를 맡다가 책을 샀습니다. 책을 사면 서점 이름이 인쇄된 포장지로 책날개를 싸주었습니다. 포장지는 낡았지만 시집은 포장지 덕에 삼십 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시를 읽는 사람이 많고 책을 사면 책날개를 싸주는 책방들이 있는 시대, 그런 시대가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의 사랑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 년 하늘 빛이 무거워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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