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엄기영의 염색 (2011년 3월 3일)

divicom 2011. 3. 3. 09:12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남자의 염색에 관해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가 타당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래전 여름날 저녁 동네 수퍼에 갔다가 남편의 회사 선배와 그 부인을 만났습니다. 저희집이 바로 지척이니 잠시 들러 주스라도 한 잔 하시자고 했더니 반갑게 응해주었습니다. 흰머리가 적당한 남편과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부인이 참 품위있고 정겨워 보였습니다.

 

한참 얘기를 나눈 후에 부인이 "이젠 우리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 집은 우리집에서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평수의 빌라였습니다. 더운 날 땀 흘리며 언덕을 오를 일이 내키진 않았지만, 그때까지 들은 얘기 때문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부부가 그 집을 장만할 때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 부인이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것 제대로 못 입었는지,' 이사 첫날 저녁 먹은 순두부가 계속 속을 아프게해 새 집에서 자지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실려갔는지, 바로 암 진단을 받고 수술받은 후 그때껏 항암치료 중인지... 부인이 두건을 쓰고 있는 건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가 안쓰러운 듯 시시때때로 눈길을 주는데 그 눈에 담긴 슬픔과 사랑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부인, 아니 선생님의 손을 잡고 가 본 75평 빌라는 넓고도 깊었지만 제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안방에 딸린 조그만 드레스룸에 있던 여러 개의 가발이었습니다. 그 후로 늘 선생님의 쾌유를 빌었지만 그분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남편을 다시 만난 건 일년 후쯤 그 회사의 모임에서였습니다. 그이는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선생님보다 십 세 가량 젊으나 좀 천박해보이는 여성과 함께였습니다. 선생님 떠나시고 채 일년도 되지 않아 새로 결혼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자신의 후배들이었지만 그이는 새 아내와 서슴없이 애정을 과시했습니다. 그 부부를 보는 내내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한편으로는 한 남자가 함께 사는 여성에 따라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놀라웠습니다. 제가 남자의 염색을 싫어하게 된 게 그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김덕룡 씨, 이회창 씨, 모두 흰머리를 검은 머리로 바꾸었지만 흰머리 시절 보여주던 품격을 찾아볼 순 없습니다. 이제 엄기영 씨가 그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뒤늦게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무수한 지지자들을 실망시키고 자신을 격하시켰는데, 사실 그의 염색 머리는 그런 변화에 어울려 보입니다. 그의 '변절'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화면 뒷편에 잠깐씩 그가 MBC 사장할 때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때의 그가, 검은 머리와 흰 머리가 아름답게 섞여 만들던 품격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