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노년일기 275: 금반지(2026년 1월 31일)

divicom 2026. 1. 31. 19:22

현관문 앞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집에 왔던 택배 상자 중에 가장 초라했습니다.

궁금한 마음으로 상자를 집어들고 앞면에 적힌 것을

보니, 주소는 정확히 우리집이지만 받는 사람의 이름

(세 글자 중 두 글자)과 전화번호(010-중간 숫자)가

다 낯설었습니다. 품목이 '주얼리'인 걸 보니 잘못 온 게

틀림없었습니다. 잘못 배달된 걸 알고 찾으러 오겠지

하고 그냥 문 옆에 두었습니다. 

 

아침에 온 택배 상자가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받을 사람의 전화번호가

다 적혀 있었으면 연락했을지 모르지만, 망설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문하지 않은 물건을 배달해서

전화를 유도하는 신종 사기가 있다는 얘길 들었으니까요.

 

저녁 늦게 집에 들른 아들이 상자에 쓰인 이름 일부를

보더니 옆집으로 갈 게 잘못 온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언젠가 한 번 본 옆집 사람의 이름인

것 같았습니다. 아들이 택배 상자를 들고 옆집으로

갔습니다.

 

아들이 돌아와 말했습니다. 옆집에선 그 택배 때문에

야단이 났었다고. 상자는 초라해도 그 안에는 요즘

한창 값이 오른 금반지가 들어 있었는데, 보냈다는

연락만 오고 물건은 오지 않으니 야단이 났던 거지요.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제 머리 속에선 좀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제일 먼저, 젊은이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날한시에 함께 옆집 사람 이름을 

보았는데 아들은 기억하고 늙은 어머니는 기억하지

못했으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다음엔 그 상자에 든 게 금반지라는 걸 몰라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반지인 걸 알았으면

잠시나마 그걸 갖고 있는 게 더 부담스러웠을 테니까요.

그리곤 부러웠습니다. 요즘 금값이 엄청 비싸다는데

옆집은 이럴 때 금반지를 살 돈이 있구나, 나는 지금처럼

비싸지기 전에도 둘째 수양딸네 둘째 아들 돌에 금 반지를

못 사 주었는데 ...

 

그다음엔 제가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에 들어와 몇 개 안 되는 금붙이와 보석을 모두

가져간 도둑이 새삼 미웠습니다. 그때 그 도둑이 없었다면

둘째 수양딸네 둘째 아들 돌에 금반지를 선물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땐 얼마나 힘들게

사는 사람이기에 한낮에 남의 집에 들어와 도둑질을 할까,

우리집을 뒤지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하고 크게

원망하지도 않았는데...

 

그다음엔, 반지를 못 보내고 양말을 보낸 후 미안해하는

제게 '반지는 꺼내보지도 않는데 뭘 그러느냐, 실용적이고

따뜻한 양말이 훨씬 좋다' 하며 저를 위로하던 수양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기도했습니다.

수양딸이 언제나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기를,

생활이 여유로울 때 마음의 여유를 유지하기 쉬우니 수양딸이

늘 여유로운 생활를 할 수 있기를...

 

금반지 소동이 끝난 자리에 기도만 남았습니다.

당연합니다. 노인의 소임은 기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