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2025년 7월 13일)

divicom 2025. 7. 13. 22:21

아파트 꼭대기에 턱을 괴고 앉은 달을

보았습니다. 지쳐 보였습니다. 해의 독재에

지친 것일까요? 사랑하다 지친 것일 수도 있겠지요.

 

높이 솟은 건물들 사이 엄거주춤한 달을

보았습니다. 저 달의 자세는 겸손일까요 비굴일까요,

솟는 것 많은 지상에서 가만히 있어도 낮아지는

우리 같은 것일까요?

 

늘 보는 얼굴과 늘 들리는 목소리 아닌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듣고 싶어,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1900-1944)의 <야간 비행 (Vol de Nuit>을

펼쳤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공군으로 참전, 1944년 아홉 번째

정찰 비행에 나섰다가 영영 사라져 버린 비행사-

소설가 생텍쥐페리...  88쪽에서 만났습니다.

 

산상에 돌기둥을 남긴 잉카의 지도자가 종족의 소멸에

대해 느꼈을 동정심, 생텍쥐페리가 세계대전 중인

인류를 보며 느꼈을 동정심, 그런 동정심이 지금 우리의

세기에도 나날이 자라고 있습니다.

원서를 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까웠습니다.

아래 인용문의 말없음표는 원문 그대로입니다.

 

 

사랑한다는 것,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 아닌가! 리비에르는 사랑하는 의무보다

더 큰 힘을 지닌 의무에 대해 숨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애정에 관계되는 일이지만,

아주 다른 애정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한 구절이

생각났다. '문제는 그 애정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디서 읽었던 구절일까?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당신 자신 속에서 소멸된다.'

페루의 고대 잉카족이 태양신을 모셨던 신전이

떠올랐다. 산 위에 똑바로 서 있는 돌기둥들.

그 돌기둥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경이적인 문명에서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잉카 문명의 지도자는 대체 어떤

무자비함, 아니 어떤 이상한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백성에게 산꼭대기에 신전을 쌓아올리라고 명하면서

그 문명의 영원성을 세우게 했을까? 리비에르는

다시 한 번 저녁이면 야외음악당 주변을 서성거리는

소도시의 군중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런 종류의

행복, 그런 겉치레는....'. 고대 민족의 지도자는

아마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지만,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꼈으리라.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막에 묻혀 버릴

종족의 소멸에 대해서 동정심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그 지도자는 사막에 묻혀 버리지 못할 돌기둥이나마

세우고자 백성을 끌고 산상으로 갔던 것이다.

  --<야간 비행>, 소담출판사, 이원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