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고추의 배신 (2024년 8월 4일)

divicom 2024. 8. 4. 10:38

물론 제 탓입니다. 이름을 믿은 저의 탓이지요.

대통령을 믿었다가 속았다는 사람도 있고

국회의원을 믿었다가 당했다는 사람도 있고

친구를 믿었다가 발등을 찍혔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아직 이름을 믿었는데, 그러다 아주 뜨거운

맛을 보았습니다.

 

지금껏 먹어 본 '오이맛 고추'는 이름 대로

오이맛이었기에 이번에도 의심 없이 사 들고 

왔는데 고추가 담긴 봉지에서 매운 향기가 나니

이상했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몇 개 자르려니

기침이 나왔습니다.

 

더운 날 불을 쓰는 반찬은 만들기 힘드니

찬물에 씻어 쌈장에 찍어 먹으려 했는데

소박한 계획은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잘게 잘라 냉동실에 넣었다가 된장찌개 끓일 때나

써야겠구나 생각하고 고추를 자르는데 손끝이

얼얼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씻으며 고추를 자르는데

손등이 스쳤던 목과 얼굴 여러 곳이 화상을 입은 듯

심하게 화끈거렸습니다. 분명히 고추가 닿지 않은

손등으로 땀을 훔쳤는데 어찌 된 걸까요?

 

얼굴과 목의 작열감이 갈수록 심해지니 이유를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두 손을 비누칠해서 씻은 후

냉동실의 얼음 조각 두엇을 꺼내어 얼굴과 목을 

문질렀습니다. 한 번으로 되지 않아 다시 얼음을

꺼내어 거듭 문질렀습니다.

 

'오이맛 고추'라는 이름을 믿은 저를 탓하다 보니

'오이맛 고추'를 키웠다가 '큰 청양고추'를 수확한

농부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잠깐 놀라고 얼음으로

치료할 정도의 화상을 입는 데 그쳤지만, 그 농부는

큰 손해를 보았을 겁니다. 모양과 크기는 틀림없는

'오이맛 고추'인데,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이름 때문에 내게 다가온

사람이 '매운 맛'을 보는 일은 결코 없게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