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울지 않던 냉장고가 올여름 들어 두 번이나
흥건하게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른 아침 무심히
냉장고 앞을 지나다 발이 물에 젖었을 때의 놀람,
그리고 신문지와 마른 걸레를 동원해 물을 닦아내는
수고... 불행은 아니지만 사람을 시험하는 불편입니다.
처음 그 일을 겪었을 때는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냉장고도 땀을 흘리나보다, 냉장고도 주인을
닮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땀을 흘리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네가 사람이냐?"는 비난 아닌
비난을 받던 제가 어느 날부터 땀 '쏟는'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리곤 잊고 지냈는데 또다시 냉장고 앞 홍수를
겪었습니다. 헌 면 셔츠 출신 마른 걸레들과 모아두었던
신문지를 이용해 물을 닦으며 버리지 않으니 쓸 데가
있구나 좋아하기도 하고, 신문보다 신문지가 낫네?
실소하기도 했습니다.
삼십 여 년을 썼으니 이젠 수명이 다 되었나 보다
생각하고 에너지 소비 1등급 냉장고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다가 신촌 모 전자 직영점에서
전시했던 냉장고를 반값에 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냉장고도 그렇게 산 것이니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곳으로 갔습니다. 막상 가서 보니
전시했던 냉장고는 지금 우리 것의 두 배가 넘는
것 두 개인데, 그나마 한 개는 팔렸다고 했습니다.
판매사원은 우리집 냉장고는 자기 회사가 물건을
'잘 못 만들 때' 나온 것이라 30년 넘게 쓰는 거라며
요즘 물건의 수명은 10년밖에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집 냉장고처럼 오래 쓰게 만들면 냉장고를
새로 사는 사람이 적을 테니 '잘 못 만든' 것이라는 거지요.
그이는 웃으며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저는 좀 씁쓸했습니다.
물건을 잘 만들어 온 세계 사람이 다 우리 회사 냉장고를
쓰게 해야지 하는 패기 대신 수명 짧은 물건을 만들어 자꾸
바꾸게 해서 돈만 벌겠다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의 말을 들으니 우리집 냉장고처럼 예전에
나온 것들은 한국에서 만든 것이지만 요즘 판매되는 것들은
같은 한국 브랜드여도 모두 중국에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직원은 새 냉장고를 사면 무상 AS기간이 1년이지만
냉장고를 '구독'하면 구독 기간 6년 동안 무상 AS를
제공한다고 했습니다. 6년 동안의 '구독비'를 더하니 그냥
사는 것보다 훨씬 비쌌는데,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은
'현명하게 구독'한다는 게 그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새 냉장고를 사겠다는 마음을 접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니 '환승'이라는 알림 소리가 들립니다. 30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저는 오늘의 한국에 대해 또 한 가지를
배운 것입니다.
엄마의 마음을 읽은 아들이 집 냉장고를 생산한 회사의
AS 담당자와 얘기를 나누더니 물난리의 범인을
밝혀 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냉장고가
울지 않습니다.
반갑다, 친구야!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내 옆에 있어다오!
우직한 시절의 산물답게 '잘 못 만들어진' 우리, 사는 날까지
울지 말고 꿋꿋이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