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병실에 드나들며 다시 한 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병실이나 대합실처럼 제한된 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적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토막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시간에 잠깐씩 보았지만
그새 손바닥만한 책 두 권을 다 읽었는데
그 중 한 권은 <파리 대왕>입니다.
언젠가 <파리 대왕>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땐
'파리'가 프랑스 파리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파리 대왕 (Lord of the Flies)>의 '파리'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 파리라는 걸 알고 적잖이
부끄러웠습니다.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 1911-1993)이
1954년에 발표한 첫 소설로, 전쟁 대피 중에
고립된 섬에 추락한 비행기에 함께 탔던
소년들이 섬에서 자기들끼리 사회를 이루고
파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소년들은 스스로 선택한 리더 랄프(Ralph)가
이끄는 대로 제법 민주적으로 의견을 모으고
실천하지만, 곧 그 리더에 맞서는 인물 잭(Jack)의
선동으로 분열됩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어떤 상황에서나 합리적
의문과 처방을 내놓지만 몸이 통통하다는 이유로
이름 아닌 별명 '피기(Piggy)' 즉 '돼지'로 불리던
소년이 군중심리에 희생될 때였습니다. 그는
천식으로 고생하는 데다 눈도 나빠 안경을 쓰는데,
그 안경 덕에 불을 붙여 고기를 구워 먹고 연기를 피워
구조 신호를 보내면서도 소년들은 그에게 감사할줄
모릅니다.
소년들의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랄프 등은
어른들이라면 이럴 때 이러지 않을 거라며 어른들의
부재를 안타까워하지만, 이미 어른이 된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사회 또한 <파리 대왕>속
소년들의 사회와 다르지 않음을.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죽음에게로 간다는 것을.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길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쯤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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