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제가 지금의 나이까지
살 줄은 몰랐습니다. 힘든 유년기와 청년기 내내
언제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살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십 대 신문기자 시절 만난 미국인 사회복지학
교수 샤츠 박사-- 성만 떠오르고 이름은 떠오르지 않네요--
덕에 마흔여덟까지 살아도 괜찮겠구나 생각했고,
마흔여덟에 만난 사회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에게서
예순여덟에도 멋질 수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 나이를 넘겨서까지 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본받고 싶은 선배님들은 자꾸 떠나가시고, 세상의
짐 또는 젊은이들의 짐이 될 것 같은 동년배들이
늘어나는 걸 보며 오래 사는 것은 무서운 일이구나,
축복 아닌 형벌이나 재앙이구나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어제 새벽 오래 살아 좋은 점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그건 바로 오래 사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기회입니다.
자신이 젊은 시절 저지른 실수나 잘못들을 반추하며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신을 다소나마 나은 인간으로
만들 기회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늙어서도 자신을 반추할 줄 모르거나
자신의 부족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의 장수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이며, '어서 가시오!' 가 담긴
눈총을 받는 시간이겠지요.
이왕 이 나이까지 살아있으니 지나간 어리석음을
스승 삼아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아, 부끄러운 흰머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