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116: 이방인 (2022년 4월 28일)

divicom 2022. 4. 28. 08:44

매일의 습관 중에 잠만큼 신기한 게 또 있을까요?

늘 눕는 자리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은 채 어둠을 응시하면

검은 먹물이나 연기 같은 것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부터

서서히 퍼지고, 마침내 시야 전체가 검정에 먹히는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죽음 비슷한 삶, 혹은 잠의 세계로 들어서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오래 전 죽은 이가 찾아오기도 하고

산과 산 사이를 날기도 합니다.  그러나 꿈의 끝은 언제나 각성.

이불을 걷고 일어납니다.

 

때로는 낮에 본 풍경들과 얼굴들이 응시를 방해합니다.

잠은 완성할 수 없는 그림으로 남고 새벽이 졸린 눈을 비빕니다.  

그럴 땐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을 내일 하듯

오늘 못 잔 잠은 내일 자면 됩니다.

 

일어나 앉은 사람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습니다.

푹 꺼진 볼, 숱 없는 머리, 주름 또 주름... 낯선 사람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부분 부분은 낯선데 전체는 낯익은 이방인입니다.

 

오래전 어느 봄날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송도 바다 보러가기' 미팅에서 

만났던 사람인 것 같은데.. 그 많던 검은 머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소리 없이 일어나 나가 거울 앞에 섭니다.

아는 사람 같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 같기도 한 흰머리 여인이 보입니다.

여인 또한 낯선 부분들로 이루어진 낯익은 이방인입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갑니다.

두 이방인이 눕고 앉은 방의 블라인드 아래로 덜 익은 햇살이 스며듭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2세> 1막 3장에 나오는 구절과 함께. 

 

"All places that the eye of heaven visits

Are to a wise man ports and happy havens.

 

하늘의 눈이 닿는 모든 곳이

현자에게는 피난처이며 행복한 안식처라네."

 

앉아 있던 이방인이 누운 이방인 곁에 몸을 누입니다.

44년 째 동거가 시작되는 새벽입니다.

각성 없는 꿈이 찾아오는 날까지 지속될... 동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