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사회는 희생자와 순교자를 만드는 사회입니다.
지난 11일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김용균 씨는
이 사회의 부당함에 희생 당했지만
그의 어머니로 인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 '여적' 칼럼에
이대근 논설고문이 쓴 '어머니와 김용균'을 읽으니
1970년 11월 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스스로 분신, 순교한 전태일 씨와 그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이소선 선생님은 그날로부터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투쟁하시다
2011년 9월 3일 40여 년 먼저 떠난 아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당함에 희생 당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며 잊히는 일이 많지만
그의 희생을 대의로 연결시키는 사람이 있을 때는
순교자가 되어 결코 잊히지 않습니다.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을
다른 '아들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이겨내며
국회에서 산업안전보겁법 전부 개정 법률안이 가결되게 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삼가 김용균 씨의 명복을 빌며
그의 어머니 김미숙 씨에게 마음으로부터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미숙님, 참으로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여적]어머니와 김용균
2014년 5월 전국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터 분회장인 염호석씨는 노조탄압과 생활고를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노조는 염씨의 뜻에 따라 노동조합장을 하려 했으나, 염씨의 아버지는 가족장으로 치렀다. 삼성은 염씨 아버지에게 6억원을 몰래 주었다. 지난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젊은 하청 노동자 김용균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이 비극을 사회로 들고 나왔다. 두 희생자의 부모가 전혀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에 따르면 갈등 범위는 힘의 균형을 바꾼다. 갈등을 사적 영역에서 다루면 서로 상대의 힘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강자는 공개적으로 힘을 겨루지 않고도 상대에게 자기 의사를 강요할 수 있다. 누구도 지는 싸움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경꾼이 늘어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어차피 싸우는 당사자는 소수이고 구경꾼은 다수이며, 구경꾼은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한쪽 편을 든다. 결국 싸움의 결과는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이는 갈등 상황에서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전략이 갈등을 사회화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염씨 아버지는 사적 해결로 사사로운 이익을 얻었지만 아들이 원하는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반면 김씨 어머니는 사회 쟁점화를 통해 구경꾼을 늘렸고, 결국 승리했다. 국회는 지난 27일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민주화가 가능했던 요인의 하나는 독재와 맞서다 희생된 젊은이들의 부모가 그 희생을 사적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가 무너졌고, 젊은이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자기 자식 한 명을 잃은 대신 수많은 남의 자식을 살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김씨 어머니같이 “너로 인해 다른 사람이 살 수 있었다”고 믿고 행동한 이들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약자는 결코 조용히 죽으면 안된다. 그건 연쇄 죽음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왜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꽃을 일으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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