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그때 이민을 갔다면(2018년 12월 24일)

divicom 2018. 12. 24. 10:49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이 나라는 제게 낯설었습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가려고 엑스레이도 찍고 서류도 작성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가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곁을 떠나는 게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실린 성우제 작가의 글을 읽으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는 캐나다에서 십여 년째 살고 있습니다.

 

그때,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면 우리 가족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우리는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분노 아닌 그리움이 우리의 가슴을 채웠을 겁니다.



[시선]매뉴얼 천국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캐나다에 살러 와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느림보 문화’였다. 전화를 신청해도 느리고, 무엇을 주문해도 느렸다. 장애인을 태우느라 버스도 느리게 갔다. 공무원과 교사, 은행과 가게 직원들은 느리게 일하기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성격이 느긋해서도 아니고 게을러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살면서 보니 느린 이유가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법과 제도, 규칙과 규정이 정한 대로 하는 문화 때문이었다. 나 같은 이방인이 보기에, 그냥 빨리빨리 해도, 대충 눈감고 넘어가도 될 법한 일인데도, 이곳 사람들은 정해진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했다. 특히 사람의 안전과 관련된 일에 대해선, 처음 경험하는 사람으로서는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릿느릿 일을 했다. 응급을 필요로 하는 일을 빼고는 캐나다 사회는 전반적으로 그렇게 돌아갔다.

내가 밥벌이로 처음 시작한 일은 식당 운영이었다. 우리 부부를 포함해 세 명이 일하는 빌딩 속 작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우리를 바짝 긴장시키는 일이 하나 있었다. 위생과 안전 불시점검이었다. 토론토시 공무원은 몇 개월에 한 번꼴로 불쑥불쑥 우리 식당에 나타났다. 물론 예고는 없었다. 그이가 훅 하고 들어오는 곳은 주방. 맨 처음에 와서는 구석구석 청결 상태를 검사하더니, 주방 바닥에 깔린 카펫형 발판을 지적했다. 발판이 움직이면 넘어져 다칠 수 있으니까 고무 재질로 바꾸라고 했다. ‘다쳐도 우리가 다치고 다쳐봐야 얼마나 다치겠나’ 싶어 차일피일 미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말했다. “가게 문 닫고 싶어? 당장 바꿔.”

운이 좋았다. 발판을 바꾸자마자 바로 점검을 나왔다. 지난번 그 사람이었다. 그이는 지난번 지적 사항부터 확인했다. 발판을 교체하지 않았더라면 벌금과 벌점을 부과했을 것이다. 벌점이 큰 문제였다. 토론토의 모든 식당과 식품점 입구에는 ‘PASS’라는 초록색 팻말이 붙어 있다. 거기에는 ‘패스’ ‘조건부 패스’ ‘폐업’ 세 단계가 표시되어 있다. ‘조건부 패스’만 받아도 손님이 뚝 떨어진다. 위생이나 안전 상태가 불량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작은 식당 주방의 발판 하나를 가지고도 그렇게 꼼꼼하게 따지고 지적하는 판국이니, 대형 사고와 바로 연결될 수 있는 불과 기름, 가스 같은 것에 대해서는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소화기는 지상에서 1m 높이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설치해야 하고, 매월 1일 상태를 점검하고 확인 표시를 해야 한다. 가스불을 사용하는 식당뿐 아니라 모든 상점이 지켜야 하는 의무사항이다. 규정대로 하지 않으면 지적을 받고, 그게 누적되면 가게 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사람이 드나드는 어떤 장소든 마찬가지이다. 규모가 크든 작든 상관없다. 보험 가입 또한 필수다. 숙박업소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사는 단독주택도 안전에 관한 한 의무사항이 많다. 화재 및 가스 경보기 설치는 기본이다.

도로나 빌딩 같은 큰 공사는 물론, 개인이 집을 짓거나 고쳐도 모든 게 느릿느릿이다. 작업 환경이 안전하지 않으면 아예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안전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무슨 공사든 끝을 보지 못한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느림은 곧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캐나다에 산 지 올해로 17년째이다. 눈길에 미끄러진 스쿨버스 사고를 제외하고는 어린 학생이나 청년들이 어디서 안전사고를 당했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에 관해서는, 매뉴얼을 무엇보다 철저하게 지키는 문화 덕분이다. 법도 안 만들고, 있는 법도 안 지키고, 법을 안 지켜도 단속도, 처벌도 안 하는 어른들 탓에 아이들이 희생되는 일이란 없다. 어쩌다가 작은 사고가 난다 해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한다. 그러니 캐나다 사회는 느리다. 나는 이 느림보 문화가 점점 더 좋아진다. 사회적으로 노하거나 슬퍼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2232029015&code=990100#csidx1e29e4fcd0e68d2baebaa0e9504aa2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