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교보문고 '100인의 책상' (2017년 11월 26일)

divicom 2017. 11. 26. 10:53

한때는 광화문 일대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교보문고의 책꽂이들을 살피다가 책 몇 권을 사들고 오면 며칠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광화문의 나이 든 나무들이 사라지고 궁전에 있어야 할 세종임금이 길바닥에 나와 앉으면서부터 

광화문은 입큰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음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날 때도 가급적 광화문 근방을 피하고 혹시 나가게 되면 얼른 벗어나려 애쓰곤 합니다.


영혼에 안식을 주던 교보문고에도 가지 않습니다. 

책이 차지하는 면적은 자꾸 줄어들고 --실제로 그런 건지 제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무 데나 앉아서 책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서가 사이를 거닐며 책을 볼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렇게 길을 막는 사람들을 없애려고 서점 측에서 '100인의 책상'이란 걸 놓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책상에 앉은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염치와 상식을 잊은 혹은 잃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이 책상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턴가 그 책상은 파렴치한 사람이 

더욱 편하게 파렴치해지도록 돕는 장치로 전락했으니까요. 


100인의 책상 말고도 교보문고에는 사람들이 잠시 앉아 책을 볼 수 있게 해둔 곳들이 있었는데 -- 

요즘엔 가보지 않아 여전히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그곳에서 책을 보는 대신 

햄버거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곳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외서코너는 조용했는데 이젠 외서코너가 가장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소위 원서보다 영어 교육을 위한 책과 교육자료들이 늘면서 

아이와 엄마들이 모여 큰소리로 떠드는 일이 다반사이니까요.


도서관, 독서실, 서점... 이름이 다른 만큼 기능도 다릅니다. 

각 장소마다 거기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양이고 책은 교양을 키우는 데 유익한 도구입니다.


서점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서점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어도 어디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은 세상의 소음을 가중시킬 뿐이니까요.

아래는 며칠 전에 자유칼럼에서 보내준 글입니다.  




www.freecolumn.co.kr

100인의 책상

2017.11.22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갔습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과 고등학생인 딸아이가 각자 필요한 책이 있다고 해서 가족 나들이 겸 광화문을 찾았습니다. 한번 서점에 들르면 몇 시간이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 책 저 책을 들척거리는 아이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에, 필자는 두어 권의 책을 뽑아 들고 책을 읽을 만한 곳을 찾아봤습니다. 그러다가 눈에 확 띄는 책상을 발견했습니다. 이른바 100인의 책상이라는 거대한 책상이었는데 100명까지는 못 돼도 60~7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사이즈였습니다. 5만 년 된 뉴질랜드의 카우리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길이만 23미터였습니다.

100인의 책상은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서 그대로 책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무의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있었습니다. 책상의 가격도 가격이겠지만 운반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이런 공간을 만든 서점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빈 의자가 있어서 가보면 의자 위 또는 책상 위에 책과 가방이 놓여 있었습니다.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때,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있어서 운 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5만 년이나 되었다는 카우리 소나무 책상의 질감을 손으로 느끼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앞자리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일흔은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빈 자리라고 생각하고 앉은 자리에 원래 앉았던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책상 위에 자신의 소지품을 두고 간 것을 가리키며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노인께서 제 자리에 앉으신 겁니다.”라고 얘기하자, “아니, 여기 자리가 니 꺼 내 꺼가 어딨어요?”라며 언짢아 하시는 겁니다. 결국 어르신은 바로 옆의 빈 자리로 옮기셨는데, 그 자리 역시 누군가가 자신의 소지품을 남겨두고 간 자리였습니다. 이후 어르신은 속칭 '메뚜기'라고 불리는 자리 옮기기를 계속하셔야만 했습니다.

필자는 읽던 책을 잠시 접어두고 책상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젊은 학생들은 비싼 전공 서적을 보며 노트 필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연세가 있으신 분들 중에는 은퇴 후 제 2의 직업을 갖기 위해 공인중개사 관련 서적을 보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권의 책을 가져다 놓고, 마치 도서관의 열람실처럼 100인의 책상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리는 필자가 앉아서 책을 읽는 내내 소지품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곳도 있었습니다. 

‘대학교 도서관도 자리를 맡아 놓는 행위에 대해 말이 많은데, 도서관 열람실도 아닌 서점의 책상에서 자리를 맡아 놓는 행위가 과연 옳은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0인의 책상은 교보문고의 소유이니 우선 소유권자의 방침이 궁금했습니다. 마침 친절하게 안내 표시가 되어있어서 사진으로 찍어두었습니다.

안내표시에 따르면 자리를 비울 때 소지품을 남겨두어 점유를 유지하는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업을 하는 서점의 입장에서는 고객의 무분별한 자리 점유를 강제로 못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고객들간의 마찰이 계속된다면 100인의 책상을 없애는 방안을 생각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살이가 100인의 책상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어떡해서든 내려오고 싶지 않고 그러다 보니 갖은 술수와 악행을 저지르며 자리를 유지하려는 부도덕한 권력자의 모습과 교보문고의 100인의 책상 앞에 앉은 소수의 욕심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지품을 두고 이석하면서 자리의 점유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회적 정의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데, 그게 세상사는 도리인데, 서점의 책상 앞에서조차도 우리는 그걸 잘 못하고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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