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우리는 소중한 '동행'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제임스 시노트(한국 이름: 진필세) 신부님이 향년 85세로 선종하셨습니다.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인 신부님은 1960년 입국하여 인천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셨는데, 1975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구명을 위해 애쓰다 강제 추방되셨고, 후에 다시 돌아와 2002년부터 국내에 체류하셨다고 합니다.
인혁당 사건(人革黨 事件)은 1964년과 1974년 중앙정보부가 유신을 반대할 가능성이 있거나 반대하는 인물들을 기소한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새벽 이들 중 8명이 대법원의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당해 '사법살인'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시노트 신부 선종에 관한 한겨레신문 기사입니다.
“약자들 편에서 진실 알린 신부님”…인혁당 사건 유족 등 빈소에 ‘빼곡’시노트 신부 조문행렬“사형 집행 직후 남편 주검을 찾아와 고문 흔적을 사진으로 찍었어요. 그때 키 크고 몸집이 좋았던 신부님이 대문을 지켜줬어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은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신다’고 위로해주셨던 기억이 선한데….” 24일 오후 이정숙(69)씨는 제임스 시노트 야고보(85·한국이름 진필세) 신부의 영정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이씨는 며칠 전에도 시노트 신부의 병문안을 왔다고 했다. 겨우 눈을 뜨고 자신을 알아보던 노신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이씨는 1975년 4월9일 남편 이수병씨를 잃었다. 박정희 정권은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남편 이씨를 포함해 8명을 사형장으로 보냈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들이다. 시노트 신부는 서슬 퍼런 정권을 향해 유족들과 함께 “주검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외쳤고,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나라 밖으로 추방됐었다. 시노트 신부는 ‘시대를 지킨 푸른 눈의 양심’으로 불렸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족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온 7년 전부터 어버이날 무렵에 시노트 신부가 머물던 서울 중곡동 메리놀외방선교회 수도원을 찾았다. 그의 생일도 챙겼다. 올해는 노신부가 유족들에게 여덟 송이 꽃을 담은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 ‘시대 지킨 푸른눈의 양심’으로 불려 동아투위 위원장·이부영 전 의원 등 그와의 인연 고마워하는 이들 발길 고 하재완씨의 유족 이영교(80)씨는 “신부님은 우리가 데모할 때마다 오셨다. 키 큰 신부님이 앞으로 나가 전경들 모자를 벗기곤 했다”고 떠올렸다. 고 도예종씨의 아들 도한구씨는 “신부님은 예수님 같은 분이다. 동족도 외면한 우리를 위해 이방인인 신부님이 약자의 편에 서서 부당함과 진실을 알렸다”고 기억했다. 작은 빈소는 생전 그와의 인연을 고마워하는 이들로 빼곡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김종철 위원장은 “1975년 3월 신문 제작을 거부하고 농성에 들어갔을 때 외부 인사로는 유일하게 편집국에 같이 남아 ‘자유언론 만세’를 외친 이가 바로 시노트 신부였다”고 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이부영(72)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지난 10월 ‘자유언론실천 4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시노트 신부의 말을 전했다.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는 것 아니냐’, ‘마음이 슬프다’며 지금의 한국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독재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씀도 하셨다”고 했다. 입관 예배는 크리스마스인 25일 오후 3시에 열리고, 장례미사는 26일 오전 11시 경기도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거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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