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옥장 장주원 (2014년 12월 3일)

divicom 2014. 12. 3. 18:10

오늘 신문에서 제일 감동적인 기사는 한겨레신문의 '장인을 찾아서'에 실린 중요무형문화재 옥장 장주원 씨 기사였습니다. 신문기자 시절 장 선생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을 오늘 다시 느꼈습니다. 한겨레 기사를 조금 줄여 아래에 옮겨둡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동행'이니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기사 전문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67167.html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100호인 옥장(玉匠) 장주원(77·사진)은 장신구에 그치던 우리의 전통 옥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스승도 없었다. 제대로 된 문헌도 없었다. 오랜 시간 노력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옥공예 종주국인 중국을 능가하는 경지에까지 오른 것이다.


“좋은 옥 원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만사 제치고 달려갑니다. 오감이 요동을 칩니다. 그리고 그 돌을 손에 넣으면 희열이 넘칩니다.”


그가 지금까지 원석을 구하러 다닌 나라만도 50여개국. 한번은 러시아로 달려가 옥 원석 48톤을 거금을 들여 사왔는데 고작 조그만한 장신구 두 개를 만드는 데 그쳐야 했다. 원석의 속이 부실했던 탓이다. “대부분 공예는 작가가 작품을 먼저 정하고 재료를 고르지만 옥은 그 반대입니다. 옥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정해요. 아무리 향로를 만들고 싶어도 향로감이 될 만한 옥이 없으면 못 만들어요.”


한번은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옥을 만지면서 용의 입안에 여의주를 굴러다니게 깎겠다고 한번이라도 노력한 사람에겐 나의 기술을 전수하겠다.” 수십명이 모였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장중현)는 목포에서 금은방을 했다. 어려서부터 금은세공에 눈을 뜬 장주원은 학창 시절 음악과 미술, 공작 등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고교 졸업 뒤 악단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22살 때부터 종로에 있는 금은 세공장에서 본격적으로 공예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숙련된 보석가공사가 하루 두 개를 만들던 복잡한 공정의 값비싼 목걸이 장신구를 그는 하루에 150여개를 만들어내는 ‘신기’를 발휘했다.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이 세상을 놀라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돈도 벌었다. 그는 종로 귀금속 상가에서 ‘목포짱’으로 불렸다.


그러던 어느날 깨진 옥향로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막막했다. 보름간 두문불출하며 방황하다가 인생의 목표점을 찾았다. “서양의 보석은 빛을 외부로 발산하며 자태를 뽐내지만, 옥은 빛을 흡수하며 마치 달빛처럼 은은한 미를 내뿜어요. 부서진 보석이나 고쳐주고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앞으로 20년 안에 세계 최고의 옥공예 기술자가 되기로 맘을 먹었어요.”


중국과 수교 전이어서 옥공예품을 볼 수 있는 대만의 박물관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침에 빵과 우유를 사들고 박물관으로 들어가 온종일 중국 전통의 옥공예품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씩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스케치를 하고 곧바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그러곤 공방에 틀어박혀 혼자 연구하며 옥을 깎아내는 비법을 익혀 나갔다. 정신 집중을 위해 한겨울에도 난로를 켜지 않고, 하루 한 끼에 2~3시간씩만 자며 노력했다.


“내년 봄에 중국 정부가 옥공예 최고 명예인 ‘1급 대사’ 칭호를 준다며 초청했어요. 중국 옥 예술을 따라잡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