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다시 기형도를 생각하며(2014년 3월 7일)

divicom 2014. 3. 7. 08:49

오늘은 아름다운 시인 기형도가 저 세상으로 간 날입니다. 1989년 3월 7일에 떠났으니 그가 없는 시간이 25년이나 흘렀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선명합니다. 기형도를 생각하면 미안함과 아쉬움이 온 몸을 채웁니다. 몸 어딘가에 있을 마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아래의 글은 2007년 3월 14일에 제가 자유칼럼에 썼던 글입니다. '기형도를 생각함'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 이 블로그의 '자유칼럼' 난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 마음이 이 글을 쓰던 때와 똑 같아 새로 쓰는 대신 이 글로 다시 제상(祭床)을 차립니다. 그때는 맨 아래에 기형도의 미발표시를 붙이면서 중간을 생략했지만 오늘은 그 시의 전문을 써 둡니다.


기형도를 생각함

 

은행나무들은 아직 죽은 듯 조용하지만 쟈스민 가지에선 작은 새의 혀를 닮은 잎들이 솟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햇빛에 데워진 땅 위로 보일 듯 말 듯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면 세상의 나무들 혈관 속마다 푸른 피가 돌고 눈 앞이 점차 화안해지겠지요. 봄은 죽은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계절입니다. 봄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것을 기뻐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돌아오지 못하는 이의 부재 (不在)가 새록하니까요. 


손바닥만한 화분에서 제법 소담스런 꽃을 피운 베고니아를 들여다 보다 3월임을 깨닫습니다. 문득 이맘때 떠나간 시인 기 형도가 생각납니다. 80년대 중반 그와 저는 모두 불행한 기자 노릇 중이었지요. 왜 불행했느냐고요? 무엇보다 그땐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자유의 시대였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면 5공화국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시지요. 저로선 모처럼 떠오른 기 형도의 기억을 흉포한 정권을 상기함으로써 망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는 그때 종합청사 10층 총리실에 출입을 하면서 하루에 한두 번 8층 외무부 (지금의 외교통상부) 기자실에 들르곤 했습니다. 외무부를 담당하던 기자가 출장 중이었거나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구불구불 굵은 파도 같은 머리칼이 흰 얼굴과 잘 어울렸고 그 머리칼 아래 다소 깊숙이 들어 앉아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요" 하는 듯한 눈이 아름다웠습니다. 마음은 전쟁 중이었겠지만 늘 웃고 있었고 그때의 저는 웃는 얼굴을 싫어했습니다. 어쩜 그는 웃지 않는 제 얼굴 뒤편 울고 싶은 제 마음을 보았던 걸까요? 보기만하면 아는 척을 했습니다. 

"김선배, 이번에 제 시가 문예중앙에 실렸는데…보셨어요?" 
"아니. 내가 언제 시 읽나?" 짐짓 무감하게 대꾸해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습니다. 
"에이, 김선배, 좀 읽어봐 주세요." 그러면 저는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던졌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냥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고 살아있는 동안 내내 후회하게 되리라는 걸 몰랐습니다. 
"죽은 시를 쓰는 산 시인아. 산 시를 쓸 궁리나 하시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를 쓰던 제가 그의 시를 읽지 않은 건 아마도 질투 때문이었겠지요. 드러내놓고 시를 쓰는 그가, 이미 시인의 칭호를 얻은 그가 부러웠을 지도 모릅니다. 80년대의 마지막 해 3월 그가 서둘러 떠난 후에야 그의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외로움과 바늘 같이 섬세한 감수성이 목덜미부터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제가 잘못 접은 종이비행기를 버리듯 무심코 던졌던 한 문장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을까 생각하며 밤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제 시와 산문들을 묶어 책을 낼 때, 거기에 "기 형도 시인에게 드리는 편지"를 넣은 건 그 언어의 화살들에 대해 참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몇 해 후에 시인들이 만드는 계간지 "시평"에 "기 형도, 그를 사랑할 시간을 놓치고" 라는 제목의 고백을 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가 돌아온다면… 아주 깊은 밤, 검은 하늘 꼭대기에 함께 올라가 거나하게 취하고 싶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알코올을 채워 삶과 죽음이 우리 안에 교집합을 이룰 때쯤 "그때 내가 했던 얘긴 농담이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3월이 올 때마다 그가 저 쟈스민의 잎들처럼 슬그머니 돌아올 것 같았습니다. 
"김선배,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었거든요. 제 시가 이번 문예 중앙에 실렸는데, 읽어보셨어요?" 그가 그러면, 반가워죽을 것 같으면서도 겉으로는 심상하게 "한참 안 보이더니 얼굴은 괜찮네? 나같이 바쁜 사람더러 시를 읽어보라고? 알았어, 한번 읽어보지, 별 볼 일 없기만 해봐라, 더 좋은 시 쓰라고 술을 사주지" 하고 싶었습니다. 

봄은 추억처럼 자꾸 오지만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에 대해 아무 말 않고 있다가 혹 이 세상 아닌 곳- 가끔은 그런 곳이 있었으면 합니다 -에서 그를 만나면 그때 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 (詩作) 메모에 썼던 대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니 제가 그를 생각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나 봅니다. 저 또한 그의 영토의 주민이 되어 다시 도둑고양이 같은 봄과 맞닥뜨리지 않게 될 때까지는 말입니다. 

비가 -- 좁은 門


열병은 봄이 되어도 
오는가, 출혈하는 논둑, 미나리 멍든 허리처럼 
오는가 분노가 풀리는 해빙의 세상 
어쩔 것인가 겨우내 편안히 버림받던 
편안히 썩어가던 이파리들은 어쩔 것인가 
분노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봄은 도둑고양이처럼 산, 들, 바다. 오! 도시 
그 깊은 불치의 언저리까지 유혹의 가루약을 뿌리고 있음을

겨울잠에서 빠져나오는

단 한 자루의 촛불까지도 꺼트리는 무서운 빛의 비명을

침침한 시력으로 떨고 있는 낡은 가로등 발목마다

화사한 성장의 여인, 눈물만큼씩의

쓸쓸한 애벌레들의 행렬을

빙판에숨죽여 엎드린 썰매, 날카롭게 잘린

손칼만큼의 공포를 
아는가 그대여, 헛됨을 이루기 위한 최초의 헛됨이 
3월의 스케이트장처럼 다가오는 징조를 
곧이어 비참한 기억으로서 되살아날 
숨 가쁜 유혹의 덫이 그리움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