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유명량, 류밍량 (2013년 6월 6일)

divicom 2013. 6. 6. 08:33

엊그제 서울 대만대표부의 류밍량 공보참사관이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980년대 제가 기자 시절 처음 만나 지금까지 긴 인연을 이어왔는데 은퇴를 앞둔 그가 갑자기 쓰러져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대만식으로 발음하면 '류밍량'씨지만 그는 이메일에 자신의 이름을 '유명량'으로 써 보내곤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한국을 잘 아는 외교관이었고 누구보다 한국어를 잘 하고 한국인 친구를 많이 가졌던 외교관이었습니다. 며칠 전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또 그가 잠시 머물렀던 호텔에서, 아직 말을 찾지 못한 그를 만났습니다. 그에 대해 뭔가 쓰고 싶었지만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다시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하지 못한 이임파티를 하러 서울에 돌아오면, 그때는 그에 대해 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마침 자유칼럼에 류 참사관의 오랜 친구인 허영섭 선생이 그를 그리는 글을 쓰셨기에 여기 옮겨 둡니다. .유명량 참사관을 아시는 모든 분들, 그를 모르시는 모든 분들,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 그는 외교관의 옷을 입은 저널리스트였습니다. 그의 반짝이는 눈과 그 눈처럼 반짝이는 재치, 세심한 배려, 그와 동행하던 때가 벌써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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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으로 떠나간 류밍량 공보관

2013.06.06


서울의 대만 대표부에 근무하던 류밍량(劉明良) 공보참사관이 엊그제 본국으로 떠나갔습니다. 정들었던 한국을 떠나면서도 가까웠던 친구들에게 인사말 한마디 남기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런 뇌출혈로 이상이 생겨 언어장애가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상대방 말은 거의 알아들으면서도 손짓으로만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야 되는 어눌한 표정으로 귀국 비행기에 오른 것입니다. 가슴속으로 할 말이 많았던 만큼 미련 또한 작지 않았음을 그의 처연한 눈길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다음달 말로 주재 기한이 끝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마침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끼리 송별 모임을 갖자며 얘기가 오가던 참이었습니다. 대만과 한국의 관계상 정식 외교관 대접은 받지 못했을망정 그래도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 해외근무를 마감하는 단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건강에 덜커덕 이상 신호가 잡힘으로써 모든 일정을 내려놓고 앞당겨 귀국 보따리를 꾸려야 했던 그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더구나 올해 쉰아홉 나이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나 서울에서 근무했던 만큼 한국과의 인연이 유별난 지한파(知韓派)였습니다.

멀쩡하던 그가 뇌경색 증세를 보인 것은 대략 보름 전 일입니다. 심근경색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요. 혈류가 막히는 바람에 뇌혈관의 어딘가가 터져버린 것입니다. 늘 웃음을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인도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즉각 병원에 도착하고도 응급실로 쫓아가는 대신 외래진료실에서 번호표를 뽑아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니까요. 이미 말문이 막힌 상태에서도 생각만큼은 아직 또렷했던 것이었겠지요.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챈 병원 직원이 서두르지 않았다면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병원 응급실에 누워 처치를 받고 있는 사이에 급하게 연락을 받은 타이베이의 가족들이 날아왔지만 차도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동작도 어색했고, 기억력도 더러 잃어 버렸겠지요. 본격적인 재활치료를 위해 곧바로 귀국 방침이 결정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삿짐을 꾸리고 서울 생활을 마지막 정리하는 과정에서 집 현관의 잠금장치나 은행계좌의 비밀번호를 기억해내는 데 상당한 애로를 겪었다고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인연을 나누었던 나로서는 더욱 안타깝게만 여겨집니다. 신문사 기자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외국여행에 나섰던 것이 대만이었는데, 그때 그가 명동의 대만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행에 필요한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대사관을 방문했다가 3등 서기관 시절의 초년병 외교관인 그를 만났던 것이지요. 한국과 대만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1986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한국과의 인연은 외교관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원광대 대학원 교환학생으로서 맺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77년에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의 화약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던 그 이듬해 한국 땅을 밟았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인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그 이듬해 이어진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격동기의 모습을 목격한 증인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에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서울예선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지요. 그만큼 한국을 속속들이 좋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이에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한국과 대만과의 관계입니다. 1992년 외교관계가 단절됨으로써 그의 신분도 정식 외교관이 아니라 민간 대표부의 직원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처음 서울에 근무하면서 사무실로 사용했던 명동 대사관은 중국의 관할로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왜 서운한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는 여전히 한국 친구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한국의 인상과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얘기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믿을 수 있는 나라다. 적어도 등 뒤에서 칼을 찌르지는 않는 사람들이다”라는 얘기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뇌곤 했습니다.

그는 특히 북한산을 좋아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북한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백운대와 인수봉으로부터 계절을 따라 변해가는 향로봉, 문수봉, 보현봉, 비봉 등 여러 봉우리의 모습을 찍어 사무실에 커다랗게 붙여놓는가 하면 언젠가는 귀국해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었지요. 

이제 그가 불편한 몸으로 훌쩍 떠나놓고 보니 귀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북한산에 오르자던 약속이 허전한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타이베이에 도착한 그는 대만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재활치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간호를 받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안정도 되찾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말문이 막힌 탓에 마지막 육성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대신 그의 아들이 남겨놓은 영어 메시지가 있습니다. “한국은 아버지의 ‘제2의 고향’입니다. 반드시 건강을 회복해서 친구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 가족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요”라고도 했습니다. 국립교통대학교 컴퓨터 전공 박사과정인 그의 큰아들 류스잉(劉時穎)은 그만큼 의젓해 보였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류밍량 참사관이 떠나기 직전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억지로 웃음을 짓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말라”는 내 얘기를 알아들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가 빠른 시일 안에 건강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울을 오가며 온갖 시시껄렁한 잡담을 늘어놓으면서 함께 북한산에 올라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겠습니다.

필자소개

허영섭

경향신문 기자를 지내다 2007년 논설위원으로 퇴직했다. 전경련 근무. 현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ㆍ교양분과 특별위원. 저서로 '50년의 신화'(현대그룹 창업기의 주역들), '법이 서야 나라가 선다'(이회창 평전),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