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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일기 267: 메모의 이유 (2025년 10월 10일)

머리와 몸 속에 구름이 떠다니고 파도가 밀려왔다 갔다 합니다. 남의 손 같은 제 손이 책상 위에 쌓인종이쪽 하나를 집어듭니다. 지난 4월 7일 월요일의메모입니다. "잘 작동하지 않는 몸이 조팝나무 흰 꽃이 보이는창을 바라본다. 단어들이 흩어진 꽃처럼 널려있지만, 그 단어들은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피로는 그림자일 뿐 친구는 아니다. 친구라면 가끔떠나줄 테니까. 길에는 무수한 햇빛 알갱이가 쏟아져 있지만내 몸의 바람 구멍들에 맞는 알갱이는 하나도 없다.당연히 길은 여전히 밝고 구멍들 속엔 어둠뿐이다." 오늘은 비가 오지만 그날은 햇살이 가득했을 뿐,그날도 오늘처럼 머리 속에 구름과 파도가 일렁였나 봅니다. 그 출렁 머리를 들고 메모하길 참 잘했습니다. 메모는 언제나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힘을 주니까..

카테고리 없음 2025.10.10

조용필 '오빠' (2025년 10월 7일)

KBS2 한국방송이 올해 들어 가장 잘한 일은 조용필 씨의무대를 준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젯밤 '이 순간을영원히' 콘서트를 보며 참 오랜만에 한국방송에 감사했습니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아나운서와 지긋지긋한'예능'과 연예인들, 후안무치한 정치인들의 얼굴을 보는 대신 수십 년 간 자신의 길을 닦아 온 아티스트를 보며 그의 음악을들으니 참 행복했습니다. 화면 속 조용필 씨. 노래는 전과 같은데 사람은 더 겸손해져보였습니다. 75세에도 '노래를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하고매일 노래 연습을 한다는 '가왕'은 한 음 한 음 정성을 다해 완벽을 기했습니다. 조용필이라는 크고 깊은 거울에 저를 비추어 보니 자연스럽게제가 그처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또는..

동행 2025.10.07

추석 도라지 (2025년 10월 4일)

추석에 쓸 도라지의 껍질을 벗기다 보니껍질을 벗겨서 파는 하얀 도라지가 왜 비싼지알 것 같습니다. 작은 옹이 박힌 도라지의살이 다치지 않게 얇은 껍질을 벗기는 게 영 쉽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얘진 도라지와, 얼마 전에 쓰고 남은 중국산 도라지를 함께 씻어 소금물에 담급니다. 국산 도라지보다 훨씬 싼 중국산 도라지도누군가가 껍질을 벗겨내어 하얀 몸이되었을 겁니다. 힘든 일이지만 도라지 껍질벗기는 일에 고임금을 줄 리는 없으니 젊은남성 노동자 대신 저처럼 나이 든 중국 여성들이벗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도에서 온 파를 다듬으며 진도 흙 냄새를맡고 진도 농부의 손을 생각하듯, 도라지 껍질을벗기며 도라지를 키운 땅과 여인들의 손을 생각합니다. 국산 도라지나 중국 도라지나 도라지는 도라지이고 땅은 땅, 손은 ..

동행 202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