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두 도시 이야기 (2009년 1월 23일)

divicom 2009. 12. 9. 11:30

정치엔 관심이 없어도 역사에는 관심이 있으니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장면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랜만에 자정 넘은 시각 텔레비전 앞에 앉습니다. 영하의 새벽을 녹이는 취임식장의 열기 덕에 졸리던 눈이 오히려 살아납니다. 아직 취임식이 시작하기 전이라 당선 전후 오바마의 활동이 먼저 소개됩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통합 추구’입니다.

마침내 오바마가 미국 44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워싱턴 D.C.의 행복한 눈물 위에 몇 시간 전 뉴스에서 본 서울의 비극적 풍경이 겹쳐지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그 첫 문단이 떠오릅니다. “제일 좋은 시대였고 제일 나쁜 시대였다. 지혜의 시대였고 우둔의 시대였다. 믿음의 시대였고 불신의 시대였다. 빛의 시대였고 암흑의 시대였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엔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엔 아무 것도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탄생을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2백만 명의 빛나는 얼굴이 밝히는 미국 국회의사당 주변은 지혜와 믿음과 빛과 희망, “우리 앞엔 모든 것이 있’는 ‘제일 좋은 시대’를 보여줍니다. 반면에, 재개발을 반대하는 철거민 진압을 위해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3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서울 용산은 ‘우리 앞엔 아무 것도 없’고 우둔과 불신과 암흑과 절망만이 남은 ‘제일 나쁜 시대’의 모습입니다. 작년 설엔 국보 1호 숭례문이 숯덩이가 되더니 올 설을 앞두고는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여 6명의 귀한 목숨이 희생되었습니다.

오늘의 미국만큼은 아니어도 1년여 전 한국도 잠시 꿈꾸었습니다. 새 대통령이 내놓은 747공약(연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강국 진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부추겨 표를 끌어 모으는데 기여한 ‘747’은 비아냥의 대상이 된 지 오랩니다. 747은 코스피지수 700대, 가구당 부채 4천만 원, 7대 빈곤국을 상징한다고 하더니, 요즘엔 7은 방송관련 7대 악법, 4는 4대강 살리기를 빙자한 대운하 추진, 마지막 7은 소위 버블7지역의 투기제한을 푸는 거라고 비꼬는 ‘2009년 판 747공약’이 인터넷에 떠돕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건 이 정부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통합 대신 분열을 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고, 경선 당시의 정적들까지 아우르는 진용을 짠 오바마 대통령과는 정반대로, 자기편만 가지고 팀을 구성하고 나라 운용 첫 해 내내 내 사람 심기와 남의 편 솎아내기에 혈안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삼는 편협함, 온라인 세상의 인기인과 경쟁을 벌이는 데서 나타나는 자신감의 결여, 무수한 국민이 겨울 가뭄으로 고생하는 나라에서 ‘불법 점거농성’을 해산한다고 물대포를 쏘아대는 무신경, 생존권의 위협 앞에 농성하는 사람들을 잡겠다고 건물 옥상에 특공대를 투입하며 투신에 대비한 조처조차 하지 않은 사랑의 부족... 셀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목숨을 잃은 다섯 명의 시민과 경찰관 한 명은 입고 있던 옷만 달랐을 뿐 모두 한 나라 국민입니다. 여섯 국민의 죽음은 다른 국민들에게 엄청난 분노와 부끄러움과 슬픔을 가져왔지만, 정부는 당황은 했을지언정 침통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날 한승수 총리가 낭독한 발표문에는 깊은 슬픔이나 반성보다는 불법 점거농성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엄포가 선명합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국무총리로서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불법 점거와 해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대해 한 점의 의혹도 없도록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입니다. 불법폭력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어느 누구에 의한 것이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법과 질서를 지키는 데 앞장서서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거듭 명절인 설을 며칠 앞둔 이 시기에 이와 같이 불행한 일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린데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한 총리의 ‘유감’이 가시처럼 눈을 찌릅니다. ‘죄송’도 아니고 ‘비통’도 아니고 유감이라니요? 국어성적만은 좋았던 저이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 국어사전을 찾아봅니다. 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이고, 有感은 ‘느끼는 바가 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총리가 사용할 단어는 아닙니다.

비교하기조차 미안한 일이지만, 아이슬란드의 올라푸르 라그나르 그림손 (Ólafur Ragnar Grímsson) 대통령은 지난 달 22일 대통령궁 밖에서 경제위기의 책임을 물으며 반정부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커피를 대접하고 얘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바로 전날엔 재무부에 편지를 보내 국민이 모두 경제위기로 고통스러우니 자신의 월급도 깎아달라고 요청했다 합니다. 총리가 정부의 수반인 나라여서 그림손은 실권 없는 대통령이라 해도 1996년 이래 4번 연임중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역사상 가장 부유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정부가 앞날이 막막한 철거민들의 울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법행위’ 비난에 목청을 돋우는 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부는 부자만을 위한 기관이 아닙니다. 마침 텔레비전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역설합니다.

“부를 창출하고 자유를 신장시키는 시장의 힘은 막강하지만... 부유층만을 위하는 국가는 오래 번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경제의 성공은 단순히 국내총생산 규모가 아니라 번영의 혜택이 개인에게까지 미치고 의욕을 가진 구성원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국가적 역량에 의존해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선적 배려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공공의 선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이 방송을 보겠지, 오바마의 통합 노력을 보고 깨닫는 게 있겠지, 기대하다가 문득 불안해집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배우지 않고 취임식의 기독교적 의례만 배우려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새벽 3시, 오바마의 뒷모습을 보자 졸음이 쏟아집니다. 혹시 내일 아침 우리 정부가 그간의 옹졸함을 반성하며 통합을 위한 계획을 내놓을지도 몰라, 다시 여러 달 묵은 희망을 베고 잠자리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