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겨울 까치집 (2008년 12월 26일)

divicom 2009. 12. 9. 11:24

나쁜 일 많은 한 해가 지나갑니다. 아주 떠나간 친구들, 병마에 잡혀 고생하는 친구들, 힘겨워지는 살림살이에 지쳐가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거리를 떠돕니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이 걷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합니다. 큰 길을 피해 곁길로 접어듭니다. 햇살이 찰랑이던 골목길에도 추위가 한창입니다.

남루한 집들의 낮은 담 너머 마당에서 얼고 있는 빨래와 발의 온기를 기다리는 신발들이 보입니다. 몇 해 전이던가, 신문에서 본 백담사 무문관(無門關)앞 풍경이 떠오릅니다. 한번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문 없는 방, 자진하여 그 방에 들어간 이의 흰 고무신에 비와 낙엽과 거미줄이 담겨 있었습니다. 절대자유를 위한 절대고독의 흔적이겠지요.

세상엔 스스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있고 하는 수 없이 도를 닦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시를 채우고 있는 고통은 말하자면 후자를 위한 장치입니다. 골목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길의 끝엔 길이 있다는 믿음을 지팡이삼아 씩씩하게 올라갑니다.

그러나 기대는 대개 배반을 품고 있는 것, 군데군데 금이 간 시멘트 담벼락이 덜컥 앞길을 막습니다. 길이 이렇게 뜬금없이 끝나버리다니, 낙담하여 돌아내려와 다른 갈래로 접어듭니다. 어디로 이어진 길을 꿈꾸며 휘적휘적 오르는 길, 북풍이 얼굴로 달려듭니다. 여긴 내 영토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새 길을 보고 싶은 열망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아니 북풍의 만류가 심하면 심할수록 열망은 더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다시 길의 끝입니다. 마구 자란 풀들이 누렇게 바랜 채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 험상궂은 몰골로 서있는 나무 조각에 “사유지! 이곳에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라고 쓰인 검은 글씨가 무섭습니다. 몸의 힘이 쭈욱 빠져 달아납니다. 얼굴을 때리던 북풍이 어느새 스며들어 온 몸이 떨려옵니다.

“사는 게 막다른 길의 연속 같아.” 병원에 누운 친구의 말이 떠오릅니다. 친구의 삶이 꼭 이 골목들 같았나 봅니다. 겨우 두 번 막힌 길을 만났다고 이렇게 힘이 빠지는데 늘 막다른 길을 만나는 삶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지친 몸을 간신히 싸들고 버스에 오릅니다. 밍크코트를 입은 중년 여인이나 검은 파카를 입은 젊은이나 추워 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침묵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과 싸우고 있는 듯합니다. 버스는 꽁꽁 언 부암동 언덕배기를 내려갑니다. 파란 하늘을 받치고 선 나무 꼭대기의 까치집으로 까치들이 들락거립니다. 이렇게 꼭꼭 싸매고 있어도 추운데 저 얼기설기한 집에서 겨울을 난다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버스는 길을 바꾸어도 마음은 까치집에 머뭅니다. 그러기를 한참, 아, 마침내 알 것 같습니다. 저 집의 비밀은 아무 것도 담아두지 않는다는데 있을 겁니다. 추위도 더위도 아무 것도 붙들지 않고 그냥 왔다가 가게 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추워하는 건 추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괴로운 건 고통과 열망을 붙들고 있어서일 겁니다. 우리가 길이 되면 추위도 고통도 다만 지나갈 것 같습니다.

마침 버스는 친구가 누워 있는 병원 앞을 지나는 중입니다. 어서 내려야겠습니다. 올 줄 몰랐다며 기뻐할 친구에게 까치집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아니 말없이 손만 잡고 있어도 내 마음 속 까치집이 친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 것 같습니다. 들어온 것은 나갈 때가 있을 거고 생겨난 것은 사라질 때가 있을 거라고, 막다른 길에선 돌아설 수 있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릅니다. 무문관을 박차고 나올 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자유로워질지 모릅니다.

나쁜 일 많았던 한 해가 지나갑니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됩니다. 새해, 길이 되고 싶습니다. 트랙터 못 다니는 경사진 땅에 호리쟁기(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가 내는 길 같은, 그런 길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