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교통방송의 '즐거운 산책' 시간에는 이영광 시인의 시 ‘헌책들’을 읽어드렸습니다.
2003년에 출간된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십대와 이십대엔 지금보다 훨씬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야가 좁았기 때문이지요. ‘너무 힘들어 지구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청계천으로 갔습니다. 그때 청계천엔 공구상들이 늘어서 있었고 공구상 길이 끝나면 헌책방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공구상에서 기름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보면서 내가 사는 게 힘들다고 하는 건 엄살이구나, 정말 힘들지 않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는구나, 반성했습니다.
공구상을 지나 청계천길에 늘어선 헌책방을 전전하다 보면 헌책 냄새에 마음이 편해지곤 했습니다. 그땐 새 책은 상품이고 헌책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어떤 인터넷서점에서 신촌에 연 헌책방에 들러보니 사람의 손때가 묻은 헌책은 거의 보이지 않고 출판사에서 그대로 온 듯한 책들이 가득했습니다. 사람의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헌책방으로 직행한 책들을 보니,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기들 같아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원래는 아래 시에서 말하듯 “신간코너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로, 재고 도서로 쌓였다가 다시 무수한 손을 거쳐”야 헌책인데... 방송에서는 시간관계로 조금 건너 뛰었지만 아래엔 전문을 옮겨둡니다.
헌책들
원수의 멸망을 보려거든 그가 늙을 때까지 기다려라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시든 주름들과
힘 빠져 늘어진 뱃가죽,
저 웅크린 매음녀의 짧은 한평생을
보라, 침처럼 흘러내리는 중얼거림이
그 옛날의 흔해빠진 사랑의 고백이거나
노골적인 호객의 대사임을 듣고
그대는 놀라리라, 스스로를 팔기 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생이
늦은 11월, 떨어져 비 젖은 나뭇잎과
쓰레기를 닮아간다는 사실,
문득 술 취한 어느 손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가 깜짝 놀라 물러설 때도
희미하게 그 어둔 눈빛 반짝인다는 사실,
이 거리의 어느 누구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팔리기를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늙음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그녀의 늙음은 너무 쉽게 노출된다
상처를 이루지 못한 비싼 사랑의 흔적들이
정액처럼 표지 위에 얼룩져 있다
신간코너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로,
재고 도서로 쌓였다가 다시 무수한 손을 거쳐
지루한 세일 기간 동안 싸구려로
드디어 제 값으로 팔리기 위해 나와 앉은 헌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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