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교통방송 '즐거운 산책' 시간에는 기형도 시인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읽어드렸습니다. 이 시는 1989년 발행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어제 칠월 칠석, 견우와 직녀의 사랑을 생각하다 이별이란 것에 생각이 미쳤고 마침내 이 시를 읽게된 것이지요. 때로는 마음 아픈 시가 마음을 씻어줍니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1980년대 중반, 5공화국 시절 기형도 시인을 만났습니다. 저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8층 외무부 기자실에 출입하는 기자였고 기형도 씨는 10층 총리실에 출입하는 기자로 가끔 외무부 기자실에 들렀습니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흰 얼굴과 잘 어울렸고 머리칼 아래 숨은 듯 들어앉은 쌍까풀눈이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그가 "김선배, 이번에 제 시가 문예중앙에 실렸는데…보셨어요?" 하기에 "아니. 내가 언제 시 읽나?" 무뚝뚝하게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여전하게 엷은 웃음을 띠고 "에이, 김선배, 좀 읽어봐주세요." 했고, 저는 무심코 "죽은 시를 쓰는 산 시인아. 산 시를 쓸 궁리나 하시게." 하고 응대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냥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지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몇 해 되지 않아 신문에서 기형도씨가 심야극장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 농담이 그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을지 뒤늦게 짐작하고 미안해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지요. 시인 기형도, 그가 떠난 지 23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가끔 찾아와 저를 괴롭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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