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즐거운 산책

황순원 선생의 틀니 (2012년 7월 28일)

divicom 2012. 7. 28. 11:15

오늘 아침 교통방송 '즐거운 산책' 시간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 '황순원 선생의 틀니'를 읽어드렸습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틀니를 끼는 분들, 임플란트로 인공이를 해 넣으시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인공이를 하고 나니 음식 맛이 예전 같지 않다고 불평하는 분들도 많지만, 틀니도 임플란트도 귀해 '이 대신 잇몸'으로 음식을 드시던 옛노인들을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이겠지요. 


몸의 어느 기관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가 아프면 이를 탓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간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노동한 이가 중년이나 노년에 이르러 고장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탓하지 말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해주면 어떨까요? '황순원 선생의 틀니'는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방송에서는 시간 관계상 한 연을 건너 뛰었지만 이곳에는 본문 전체를 옮겨둡니다. 첫줄의 '단고기'는 개고기입니다. 오늘은 중복... 개고기 말고도 먹을 게 많은 여름날입니다. 



황순원 선생의 틀니


황순원 선생님 단고기를 잡수셨다

진달래 꽃잎 같은 틀니를 끼고

단고기 무침이 왜 이리 질기냐고

틀니를 끼면 행복도 처참할 때가 있다고

천천히 술잔을 들며 말씀하셨다


아줌마, 배바지 좀 연한 것으로 주세요

우리들은 선생님의 틀니를 위해

일제히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황선생님만큼은 틀니 낀 인생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틀니를 끼면 인생은 빠르다

틀니를 끼면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틀니를 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생의

덜미를 잡히기 시작한다

틀니를 끼는 순간부터 인간은

육체에게 비굴해진다


서울대입구 지하철역

경성단고기집을 나오자 봄비가 내렸다

황선생님을 모시고 우리들은 어둠속에서

밖을 향해 계속 길을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틀니를 끼고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할 날들이 더욱 두려워


더러는 지하철을 타고 가고

더러는 택시를 타고 가고

더러는 걸어서 가고

평생에 소나기 몇 차례 지나간

스승의 발걸음만 비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