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한가운데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바람은 거세어도 떨어지는 꽃잎은 드물고 사람들도 가끔 옷깃을 여밀 뿐 귀가를 서두르진 않았습니다. 차 없는 인사동 거리를 꽉 메운 사람들을 피해 아름다운 가게 안국점의 커피를 마시러 갔지만, 아차! 일요일, 검은 기와 한옥은 컴컴했습니다. 다시 갔던 길을 돌아 그나마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윤보선 생가의 문은 굳게 잠겨 있고 골목 곳곳에 놓인 벤치엔 꼭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봄이 위험한 건 봄이 사람들을 불러내기 때문이겠지요. 동학혁명을 비롯해 4.19와 5.18이 모두 봄에 일어난 게 우연은 아닐 겁니다.
길이 아무리 소란해도 문향재(聞香齋)는 고요합니다. '향기를 듣는 집'이라는 이름 값을 하는 것이지요. 차가운 둥굴레차 한 잔이 머리 속을 씻어줍니다. 책 읽는 모임에서 만난 다영씨가 네잎 클로버와 편지 한 장을 수줍게 건넵니다. 행운은 나이든 저보다 젊은 다영씨에게 필요할 것 같아 돌려주려 해보지만 결연히 거부합니다. 그것을 꼭 제게 주고 싶었답니다. 녹색의 동그라미들과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가 참으로 완벽합니다. 자연은 본래 이다지도 완벽한 걸까요? 누군가의 눈에는 길을 메운 사람들과 문향재에 들어 앉은 우리들도 이 클로버처럼 완벽하게 보일까요?
둥굴레차 한 봉을 사 다영씨와 나눠들고 다시 바람 부는 길로 나섰습니다. 북촌 길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차들이 데모대처럼 늘어서 있었습니다. 봄다운 봄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사라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이렇게 한가로이 오월 속을 걸으며 살아있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건 자신의 봄을 일찌기 포기한 무수한 분들 덕이지만 그 분들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역사의 오류가 되풀이되는 건 그런 사람의 수가 적어서가 아닐까... 그러고보니 내일 모레는 5.18입니다. 잠시 광주 5.18묘역의 하얀 비석들을 생각합니다. 어제는 행복했는데 오늘은 가슴이 답답합니다. 어쩜 하늘은 마음의 반영일까요? 창밖 하늘이 뿌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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