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석가탄신일 (2011년 5월 10일)

divicom 2011. 5. 10. 09:53

부처님 오신 날이라 연꽃 빛깔로 글을 올릴까 했는데 기계가 허락하는 색이 겨우 이 정도입니다. 진흙 속 연꽃 빛엔 미치지 못하나 부족한 부분은 심안(心眼)으로 메꾸어주십시오. 아래의 글은 2008년인가 제가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쓰던 때 가톨릭 다이제스트라는 잡지의 청탁을 받고 쓴 것입니다. 당시 신문 칼럼엔 제가 '시인'으로 소개되어 있었고 제게 전화를 건 잡지 편집 직원은 제게 김흥숙 시인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시를 쓰고 시집을 낸 적은 있으나 등단한 적은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분은 상관없다며 그 잡지의 '그림 한 점'이라는 코너에 실을 글 한 편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희 집에서 거울 노릇을 하는 그림 한 점이 떠올랐습니다. 불교의 보살을 그린 그림에 대해 써도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글과 글이 묘사하는 그림의 사진을 보냈으나 잡지에 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림과 글이 온통 불교 얘기이기 때문에 실리지 못했을 수도 있고,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제가 등단한 시인이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오늘 문득 그 글이 떠올라 실어둡니다. 아래의 글을 그대로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보냈는지 어디를 고쳐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림 거울

 

우리 집 그림들은 주로 앉아 있다. 벽에 못을 치는 게 누군가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일처럼 느껴져서이다. 앉아 있는 그림 중 한 점은 거울 없는 방의 거울 노릇을 한 지 4년이 지났다.

 

2004년 설 다음날, 명절 연휴에 가족들을 두고 집을 나선 건 김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선배’하면 고향 선배, 학교 선배를 연상하지만 김 선배는 동향도 동창도 아니다.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의 ‘시 창작교실’에서 동급생으로 만났으니 그녀를 부르는 ‘선배’라는 호칭엔 오로지 존경뿐이다.

 

1999년, 소위 아이엠에프 사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자 7년간의 칩거(?)를 끝내고 새 직장에 다닐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미국기관이었지만 내게는 아주 이상한 '제 3세계,' 한국도 미국도 아닌 제 3세계였다. 입사 한 달 만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첫째는 돈을 버는 거였고 둘째는 미국과 미국인 공부였다. 어떻게 하면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다 ‘시 창작교실’에 다니기로 했다. 한국 속 미국의 영토에서 8시간을 보내다 보면 때 안 묻은 모국어가 몹시도 그리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 선배를 만났다.

 

“여기서 뭐하세요? 절에 가서 밥을 지으셔야 할 분이?” 살다보면 가끔 내 입에서 내가 의도하지도 않고 허락하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갈 때가 있는데, 김 선배에게 건넨 첫마디도 그랬다. 놀라운 건 그녀의 반응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밥하러 가야하는데...” 심상한 어조였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지만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간병인으로 생활하는 선배는 자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번 인연을 맺은 환자는 병원을 떠나면서도 그녀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다 보니 선배는 주로 남의 집에서 생활했는데, 철저한 성격답게 근무 시간 중에는 핸드폰을 받지 않았다. 이성이 아니라 그런지 만나지 못한다고 경애하는 마음이 줄어들진 않았다.

 

깊은 산골, 아이는 많으나 가난한 집에 태어난 선배는 정규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십대에 상경, 별의별 일을 하며 스스로를 부양했고, 독학으로 국어는 물론 영어와 한문 실력까지 갖추어 웬만한 책은 읽는다고 했다. 그런 선배가 모처럼의 휴가에 시간을 내준 것이다.

 

가게들이 문을 닫아 을씨년스런 교보문고 뒷골목에서 문 연 밥집 하나를 간신히 찾아내어 밥을 먹었다. 이제 차를 마시며 밀린 얘기를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나 망설일 때 조계사 발치의 ‘산중다원’ 생각이 났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가까워 가끔 혼자 들르던 곳, 용케도 열려 있었다. 차를 거푸 마시며 밀린 얘기를 나누다 자연의 부름을 받고 잠시 나갔다 돌아오니 찻집의 주인 (조계사 신도들이 돌아가며 맡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이 선배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저쪽에 앉은 스님이 그린 그림 얘기란다. 어서 주인을 돌려보내고 싶어 그림을 보자 했더니 그림을 덮고 있던 종이를 걷어내었다. “관세음보살이세요.”

 

불교와의 인연이라고 해야 관광객으로서 절에 들르거나 ‘산중다원’에서 차를 마시는 게 고작이었으니 누군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세로로 긴 액자 속에 서 있는 이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제가 들고 갈 테니 이쪽에 두시지요” 했더니,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지도 않는 얘기를 이었다. 저 스님은 서울 근교의 절에 사시며 평생 불화(佛畵)를 그려 절을 유지하신다, 원래는 그림값을 훨씬 많이 받지만 오늘은 특별히 10만원에 드린다, 게다가 자신의 말을 듣고 그림을 산다고 하니 스님이 자신에게 주신 예쁜 달력도 덤으로 주겠노라. 그리곤 순식간에 A4 용지 두 장만한 달력을 가져 왔다. 늘 비어있던 내 가방 속에 그날따라 왜 새 돈 10만원이 든 흰 봉투가 있었을까... 헤어질 때 선배의 손엔 달력이, 내 손엔 가로 40센티미터, 세로 90센티미터 액자가 들려있었다.

 

집에 도착해서야 찬찬히 들여다보니 연분홍빛 연꽃 한 복판에 맨 발로 선 이는 여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귀고리가 달린 귀는 목에 닿았고, 한가운데에 푸르스름한 연꽃 비슷한 게 붙은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의상 위에 여러 가지 색의 구슬을 이어 만든 장식이 흐르는 듯 했다. 그이의 왼쪽, 위에서 아래로 쓴 몇 개의 문장 중에 ‘南無大勢之菩薩 摩訶薩(남무대세지보살 마하살)’이 있었다. 찻집 주인이 관세음보살이라 했으니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인가 하고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대세지보살은 부처의 오른쪽에 서서, 왼쪽에 서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부처를 모신다고 되어 있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로 중생을 구하고 대세지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미혹함을 없앤다는 것, 보살은 중생과 부처의 중간 단계에 있는 존재로 중생을 구제하여 부처로 인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선배 덕에 우연히 만난 그림이 하필 대세지보살이라니. 어쩜 이 그림은 내 부족한 지혜를 일깨워주기 위한 선배의 선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 부디 내일은 오늘보다 지혜로웠으면 하는 염원을 품고 그 앞에 앉아 하루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성을 내거나 나쁜 생각을 한 날은 그 앞에 앉기가 부끄럽다. 어느새 그림이 거울이 된 것이다. 선배와는 그날 이후 만나지 못했지만 잘 지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그녀는 우리가 한참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보지 못하는 동안 부지런히 지혜를 닦아, 언젠가 반가운 해후를 하는 날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이 그림과 나를 맺어준 게 아닐까? 보고 싶다, 김 화자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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