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연 (2010년 10월 21일)

divicom 2010. 10. 21. 09:20

추석이 지난 후 언제부턴가 갓김치 생각이 났습니다. 배추값이 한창 비싸 배추 김치 대신 오이와 가지 김치를 담아 먹던 때입니다. 인터넷 시장에서 갓김치를 클릭하니 판매 상품이 얼마나 많은지 선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안팎으로 바쁜 일이 많아 아예 제쳐두었습니다. 그래도 밥을 보면 자꾸 갓김치 생각이 났습니다.

 

오랜 친구가 한참만에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누구보다 엄격하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인데 바로 그날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게다가 자신이 무거운 것을 주려고 하니 만난 후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바로 가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어깨가 아파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는 제 사정을 알고 하는 말입니다. 늘 주는 친구라 '뭘 또 주려하느냐, 제발 그러지 좀 말라' 야단을 쳤지만, 직장에까지 가지고 온 것을 모르쇠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저녁에 시간이 있어 만나기로 했습니다.

 

하얀 정사각형 스티로폼 상자는 보기에도 무거워 보였지만 친구는 손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침 부근에 아는 가게가 있어 그곳에 상자를 맡겨 놓고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습니다. 부모님 얘기, 직장 얘기 하다 보니 두어 시간이 훌쩍 갔습니다. 상자에 든 것은 갓김치라 했습니다. 언젠가 제 블로그에서 비싼 배추 대신 오이와 가지로 김치를 담갔다는 글을 읽고 갓김치를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친구집이 더 머니 제가 배웅을 해야 하건만 친구는 얼른 택시를 잡아 저를 밀어 넣고 스티로폼 상자를 실어주었습니다. 친절한 기사가 문 입구에 차를 대주어 제가 상자를 드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씻고 상자를 여니, 갓의 향이 와락 달려들었습니다. 튼튼한 비닐 봉지에 꽁꽁 싸여 있는데도!

 

얼른 비닐을 풀었습니다. 붉은 양념과 푸른 갓의 조화가 일품이었습니다. 저녁식사 직후인데도 금세 입안에 침이 고였습니다. 한 줄기를 따서 입에 넣으니 '바로 이 맛이야!' 소리가 절로 났습니다. 지나가던 아이도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여러 통에 나누어 담아야 했습니다. 다음 날 부모님댁에 조금 갖다 드렸더니 맛을 보신 어머니가 '이렇게 맛있는 갓김치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친구가 주었다고 대답하는데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와 제가 처음 만난 건 화보 잡지 기자인 그가 책을 낸 저를 인터뷰하러 왔을 때입니다. 집 떠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저지만 그 친구 덕에 땅끝 해남도 가보고 소쇄원 대나무도 보았습니다. 그와 제가 하는 일은 바뀌었지만 그와 저의 관계는 여전합니다. 그는 여전히 예의바르게 저를 대하고 제게는 여덟살 어린 그가 귀한 동생 같습니다. 

 

그와 저의 관계에 있어 유일한 문제점은 그가 저를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 차이 탓이긴 하겠지만, 그는 저를 꽤 훌륭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한때는 '저러다 내 본색을 알아버리면 얼마나 실망할까' 염려가 되어 '제발 나를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입니다.

 

제가 아직 '어떻게 해야 이익이 될까?'하는 질문 대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하는 질문과 씨름하는 것은 바로 이 친구와 같은 친구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를 실제보다 높이 봐주는 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저를 채찍질하게 되는 것이지요.     

 

친구를 만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이십대였던 친구는 사십대가 되었고 삼십대였던 저는 오십대가 되었습니다. 부디 우리의 관계가 우리 각자를 키워주기를, 우리의 삶이 저 갓김치처럼 향기롭고 그윽하게 익어갈 수 있게 도와주기를 기원합니다. 문성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