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오늘 저녁은 콩나물밥 (2008년 3월 7일)

divicom 2009. 11. 2. 07:43

사람에겐 잔인해지려는 본성과 게을러지려는 본성이 있다고 하더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첫 번째 본성의 지배를 받는가 보다. “살 쪘네요!” 듣는 사람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명랑하게 건넨다. 겨우내 감기를 오래 치르느라 몸이 둥글어진 탓이다. 어려서 감기에 걸리면 매운 콩나물국에 밥을 잔뜩 말아주시며 잘 먹어야 낫는다고 가르치신 어머니 덕에 아프면 아프지 않을 때보다 더 잘 먹는다. 게으르되 잔인하진 못한 성정 탓에 복수는커녕 “얼굴이 보름달 같지요?”라고 동조하며 웃는다. 속으로는 어서 몸을 줄여야지, 마음을 다잡는다.

 

마침 식재료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으니 몸을 줄이기에 알맞은 때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곡류, 그 중에도 밀가루값의 상승이 가파르다.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소비하는 밀가루가 33㎏이 넘고 1인당 라면 소비량이 세계 제일인 나라에서, 밀가루 값은 50~60%, 라면 값은 10% 이상 올랐다고 한다. 게다가 이 맹렬한 상승세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더욱 심화될 거라는 보도가 불안을 부채질한다.

 

2007년 9월부터 2008년 8월에 이르는 2008 세계 곡물 연도의 곡물 소비량은 전년도에 비해 3%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같은 기간 곡물 재고율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리라 한다. 또한 중국의 경제 성장이 양질 식품의 소비를 가속화하여 좋은 식재료를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거라고 한다. 그래 그런지 텔레비전 뉴스엔 더 오를 것에 대비해 라면과 과자 등을 사재기하는 살림꾼들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사재기를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가정집에 사서 쌓아둔다 해도 기껏 한두 달이면 바닥이 날 거고, 줄어드는 재고를 보며 마음을 졸이게 될 테니, 당장 굶어죽을 처지도 아닌 사람들이 먹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는 게 우습다. 그보다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체질을 바꾸는 게 나을 것이다. 우선 수입 밀가루 소비를 줄이고 쌀 소비를 늘리면 어떨까. 세계 쌀 시장에선 수급 불일치로 값이 폭등하고 있다지만 우리나라 사정은 아직 좀 다르다. 1998년에 하루 평균 271.7g의 쌀을 소비하던 국민 한 사람이 작년엔 22.4%나 줄어든 210.9g을 소비하는 데 그쳐, 쌀농사만 지은 농가의 월 평균 순수익이 4인 가족 기준 월 최저생계비의 17.3%에 불과했을 거라고 한다. 밀가루 대신 밥을 먹으면 쌀농사 농가에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수입 곡물 중에서도 옥수수는 주로 가축의 사료로 쓰여 옥수수값 상승은 육류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고기를 많이 먹으면 몸에 열이나 더위를 많이 타게 되고 체질이 산성화되어 잔인해진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새 우리나라의 날씨는 아열대를 향해 가고 있어 여름이 예전보다 훨씬 덥다. 일주일에 한 번 고기를 먹던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으로, 매일 먹던 사람은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이면, 더위와 싸우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잔인해지려는 본성과 싸우는 데도 좋을 것이다.

 

유래 없는 경제 성장을 이룬 덕에 그동안 너무 많이 먹고 살았다. 한국인은 굶주린 시절을 오래 겪은 덕에 적게 먹고도 잘 버틸 수 있는 유전자를 갖게 되었는데 근래 서양의 식습관을 흉내 내다 비만해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닦는 도도 도라고 했으니 지금부터 덜 먹기를 시작하여 에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로 허덕이는 나라들의 본보기가 되어보자. 몸이 가벼워지면 게을러지려 하는 본성과 싸우기도 쉬울 테니 말이다. 당장 오늘부터 가볍게, 밥 먹자. 우리 집 저녁은 콩나물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