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사랑할 때와 죽을 때 (2008년 2월 22일)

divicom 2009. 11. 2. 07:39

죽어라 사랑하는 이, 죽은 다음에 사랑하는 이, 떠난 사랑 앞에 침묵하는 이, 떠난 자리에 앉아 통곡하는 이, 사랑이 떠난 것조차 알지 못하는 이, 입으로 슬픔을 말하며 눈으로 새 사랑을 구하는 이 …. 하여 숭례문 무너진 서울은 시끄럽다.

 

불을 붙인 건 ‘채 노인’이지만 불을 붙이게 한 건 숭례문일 거다. 육백년 넘게 키워 온 인내로도 더는 무례함 견딜 수 없어 어리석은 손 끌어당겼을 거다. 밤낮으로 매운 찻길 한가운데 ‘끙’ 소리 한번 안 내고 서 있는 일, 그나 되니 그리 오래 견뎠을 거다. 먼지처럼 세상을 떠돌다 제 가슴에 와 깃드는 집없는 사람들, 그 신음도 더는 들을 수 없었을 거다. ‘예’(禮)는 무능이고 헛것이라며 실용을 외치는 자들, 제 아비의 무덤 앞에서조차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이 늘어가는 도시에서, 아무리 역사적 사명이 있었다 해도 더는 참을 수 없었으리라.

 

영원 같던 불길이 사라지고 검은 뼈대만 남은 후에도 숭례문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얼어가는 아비의 주검을 두고 유산 싸움을 벌여도 죄가 되지 않는 시대이니, 그 아름다운 잔해를 포클레인으로 쓸어 담아 폐기물로 버렸다 해도 죄가 아닐지 모른다. 인터넷 경매 시장에 ‘숭례문 기와’를 올려 ‘즉시구매가 100만원’에 판매하거나, 차디찬 땅바닥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조의금’을 종용하거나, 주검 바로 앞에서 영정 사진을 판다 해도 죄가 아닐지 모른다. 죄가 죄 아닌 시대, 감옥 밖의 죄인들은 제 죄를 모르니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든다.

 

‘예’를 아는 나라였다면 무채색 옷 단정히 입고 주검 앞에 모여 고개를 숙였으리라. 대통령부터 노숙자까지 직업도 종교도 나이도 지갑도 제쳐두고, 나라의 보물을 간수하지 못한 죄를 함께 나누며, 선대에 지은 죄와 후대에 지은 죄를 뉘우쳤으리라. 마땅한 예를 갖추어 제사를 모시고, 입 굳게 다물어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노라고 가슴으로 다짐하며, 주검 또한 예를 갖춰 수습했으리라. 기와는 손으로 집고 재는 삽으로 떠두었다가 새로 짓는 집의 일부가 되게 하거나 눈 닿는 곳에 두고 경계를 삼았으리라. 재가 식기도 전 복원 계획을 발표하는 대신, 부자 되려 달리느라 잃어버린 경건함을 검은 재에서 찾아내어 오히려 세계를 놀라게 했으리라. 잔해 주변에 서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세계 시민들에게 고속 성장이 가린 우리의 본모습을 일깨우며, 시간이란 무엇이며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생각할 거리를 주었으리라.

 

하나, 상복을 입어야 할 사람들은 벌써 바퀴 위에서 바쁘고, 속도를 이기지 못해 초라해진 시민들과 구경꾼들만이 상가를 지키며 제 안에 쌓인 한을 풀고 있으니, 참담에서 깨닫는 자는 아프지 않고도 깨달을 자들뿐이다. 숭례문을 다 태우고 주검마저 훼손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우선 입을 다물자. 입안에 고이는 언어로 각자의 마음에 집을 지으며 우리 삶의 속도를 줄이자. 고속 성장의 뒤안길에서 좌절과 분노에 몸을 맡기는 이웃의 수를 줄여나가자. 사랑하는 법을 몰라 떠나보낸 숭례문 앞에서 사랑을 시작하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강은교·사랑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