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기테이 손'과 '쇼루 난' (2025년 8월 14일)

divicom 2025. 8. 14. 23:07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참 복잡미묘합니다.

세계인들 중에서 일본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소리 높여 일본을 비난합니다.

 

작년 일년 동안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881만7,800명으로

그 전해에 비해 26.7퍼센트 증가했는데, 그 수는 역대 최고였던

2018년의 753만8,952명보다도 약 17퍼센트 많았다고 합니다.
(여행신문 https://www.traveltimes.co.kr)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본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는 매우

인기가 높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위해 

일본제 볼펜을 밟아 못 쓰게 만든 한국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유니클로를 입는 젊은이들만 일본에 가고 일제 볼펜을 밟아

망가뜨리는 젊은이들은 일본에 가지 않을까요? 

 

조선의 수도는 한성부였으나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경성부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경성'의 의미를 모르는 젊은이들 중엔

당시 경성의 풍조를 낭만으로 오해하고 흉내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경성은 본래 수도를 뜻하는 일반 명사이지만 일제는

그것을 한성을 대치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했습니다.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 (1910-1945)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그 35년은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고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국민의 끈질긴 노력으로만 아주

조금씩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아래 기사가 다룬 손기정 선생과

남승룡 선생의 이름 찾기에서 보듯.

 

맨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동아일보 '횡설수설'에 실린 칼럼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89년 만에 제 이름 찾은 ‘기테이 손’과 ‘쇼류 난’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는 시상식 직후 일본 

측이 마련한  격려 만찬에 가지 않았다. 대신 베를린의 한 두부 공장으로 향했다. 

교민 10여 명이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 음식이라곤 공장에서 만든 두부와 

김치가 전부였다. 공장 벽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시상식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월계수로 가렸던 손 선수는 그날의 소회를 훗날 자서전에 적었다.

“잃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우리 민족도 살아있단 확신이 들었다.” 그 두부 공장의 주인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이었다.

▷승전보를 안고 돌아온 24세 청년은 방송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인터뷰를

강요당했다. “저는 손기정입니다. 이 승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유품인 한 음반에 이런 육성이 담겨 있었는데 “크게

읽어, 크게 읽어”라고 지시하는 목소리가 함께 녹음됐다. 손 선수의 당시 인터뷰는

말한 것이 아닌 읽은 것이었다.

▷그해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엔 ‘승리자의 벽’이 들어섰다. 메달리스트들의

이름과 국적이  하나하나 새겨졌다. 손 선수는 ‘마라톤 우승자 일본인 손’으로

각인됐다. 그 후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홈페이지에도 국적은 일본, 이름은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등재됐다. 우리 국회와 체육계의 줄기찬 수정 요구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IOC는 손 선수를 바꿔주면 식민 지배를 겪은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40여 년에 걸친 끈질긴 설득에 IOC도 결국 화답했다. 최근 홈페이지 선수

명부에서 손 선수의 일본식 이름 바로 아래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된 것이다.

출전 당시 강제로 일본 국적과 이름을 써야만 했다는 점도 명시됐다. 소개 글에는

손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한국 이름으로 서명했고, 출신국을 묻는 질문에

한국이라고 답하며 별개의 나라라고 강조했다는  설명이 담겼다. 손 선수와

나란히 출전해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 선수도 일본식 이름 ‘쇼류 난(Shoryu Nan)’

아래에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됐다.

▷2002년 별세한 손 선수는 “나를 기억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강요된

국적과 이름을 걷어내고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록되기를 그만큼 염원했다.

김구 선생은 1946년 8월 손기정 우승 10주년 행사에서 “나는 손 군 때문에

세 번 울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우승 소식에 감격해서 울었고,

헛소문이지만 그가 일본군이 되어 전사했다는 소식에 슬퍼서 울었고, 광복 후

그와 다시 만나 기뻐서 울었다.” 김구 선생이 살아있었다면 손 선수가 89년 만에

제 이름을 되찾은 게 후련해서 또 울었을 것이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50813/1321842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