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헌 변호사. 정지윤 기자
60년간 법정과 사회에서 인권 신장에 기여한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20일 밤 9시쯤 별세했다. 향년 88세.
1960년대 군사정권 때부터 다수의 시국사건을 맡아 ‘시국사건 1호 변호사’, ‘인권변호사’로 불린 고인은 자신의 호인 ‘산민(山民)’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1호·2호로 불리는 것은 빵집 이름 같고 “변호사라는 말 속에 이미 인권을 지키는 직분이 들어있다”고 했다. 군사정부의 ‘눈엣가시’로 찍혀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았다.
고인은 1934년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법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전북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지만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계에 발을 들였다.
1960년부터 5년간 통영지청, 법무부 검찰국,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일했다. 그러다 “정말 자유롭게 살겠다는 일념”으로 변호사가 됐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본격화하던 때다. “정부가 미워하는 사람을 변호”할 일은 많았는데, 막상 나서는 사람이 적었다. 고인은 변호사로 개업하자마자 시국 사건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처음 맡은 필화사건은 1966년 남정현 작가의 소설 <분지> 사건이다. 홍길동의 10대손 홍만수가 주인공인 소설은 미군 병사의 성폭력 등 만행을 소재로 삼았다. 검찰은 반미 감정을 조성한다며 ‘반미용공’으로 몰았다.
고인은 이후로도 언론인, 작가, 교사 등이 연루된 필화사건을 많이 맡았다. 동백림 간첩단 연루 문인 사건,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사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 탄압 사건, 민중교육 사건, <즐거운 사라> 사건 등이다. 대학 때는 학보사 기자였고, 1960년대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이력이 영향을 미쳤다. 검사로 일하던 1961년 첫 시집 <인간귀향>을 냈고, 1967년 변호사로 활동하며 두번째 시집 <노숙>을 냈다. 고인은 “검사 초임지가 문인들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통영”이라며 “문인들과 많이 친하니까 필화사건 당하거나 하면 그 인연으로 법정에서 변론하고 한 것”이라고 했다.
필화사건을 자주 맡다보니 어느새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가 됐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박정희정권은 1974년 봄 유신 반대투쟁을 하던 민청학련을 겨냥해 긴급조치 4호를 발령했다. 학생의 무단 결석이나 시험 거부에도 5년 이상의 징역을 처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는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이들 사건으로 253명이 구속됐다. 197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고인과 조준희(2015년 작고)·홍성우(2022년 작고)·황인철(2010년 작고) 변호사 등이 이 사건을 맡았다. 재판을 맡은 군법회의는 요식 절차였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의 사형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18시간 만에 집행됐다. 군법회의는 군 검찰관이 구형하는 대로 “한 푼도 안 깎아주고” 판결했다. 당시 고인이 남긴 “한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삼각지 군법회의에서 확립되었다”는 말은 후에 ‘정찰제 판결’이란 말로 회자됐다.
고인이 직접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고 사형제를 비판하는 수필 ‘어떤 조사(弔辭)’를 <여성동아>에 기고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129명의 변호인단이 고인을 위해 변론했다. 이 일로 8년5개월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