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응급실'에서 만난 시(2019년 11월 15일)

divicom 2019. 11. 15. 11:17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피 맛 좋은 카페가 생겼습니다.

단독주택을 개조해 만든 카페는 맑은 눈의 누나와 동생이 운영합니다.


주인들이 유명한지 커피 맛 때문에 유명해진 건지는 모르지만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진을 찍고 목소리가 큽니다.


살림에 여유가 없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카페는 

'응급실(ER: Emergency Room)'과 같습니다.

돈이 없어도 살아가기 위해 커피 한 잔이 꼭 필요할 때 찾아가는 곳이니까요.


그 카페의 이름도 'ER'이지만 '응급실'의 ER이 아니고 Esperanza Roasters입니다. 

Esperanza는 여성의 이름으로 스페인어이며 희망과 기대를 뜻한다고 합니다. 

Roasters는 말 그대로 커피 볶는 기계나 사람을 뜻하겠지요.


얼핏 보면 카페 이름 ER과 응급실의 ER이 무관해 보이지만

희망과 기대가 응급실만큼 가득한 곳도 없음을 생각하면

두 ER은 통하지 않는 듯 통하는 것 같습니다.


ER에는 책이 좀 있는데 그곳에서 최영미 시인이 최근에 낸 시집을 만났습니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시집을 낸 이미출판사는 최 시인이 시작한 출판사라고 합니다.

지난 4월 2일 출판사 등록을 마치고 6월 26일에 이 시집을 냈는데 7월 30일에 초판 5쇄를 찍었다고 합니다.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했다가 고 시인으로부터 역고소를 당한 후에

나온 시집이니, 최 시인을 응원하는 사람들, 고은 시인에 맞서는 '미투(Me Too)'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시집을 샀겠지만 그런 사건과 관계없이 최 시인은 아주 많은 팬을 거느린 시인입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별밭을 걷는 느낌이 듭니다. 무수한 별들 중에는 꽃처럼 환한 별도 있고

붉은 피를 철철 흘리는 별도 있습니다. 아하! 할 때도 있고 가슴과 눈이 뜨거워질 때도 있습니다.

여기 옮겨두고 싶은 시가 많지만, 그의 시집을 사는 사람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 한 편만 아래에 옮겨둡니다.


내버려둬


시인을 그냥 내버려둬

혼자 울게 내버려둬


가난이 지겹다 투덜거려도

달을 쳐다보며 낭만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

무슨무슨 보험에 들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

건강검진 왜 안 하냐고 잔소리하지 말고

누구누구에게 잘 보이라고 훈계일랑 말고

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

사교의 테이블에 앉혀 억지로 박수치게 하지 말고

편리한 앱을 깔아주겠다,

대출이자가 싸니 어서 집 사라,

헛되이 부추기지 말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

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

제발 그냥 내버려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