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의 리더였던
약산 김원봉을 언급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긴 했지만 해방 후 월북한 사람인데
그를 복권시키려는 것이냐며 문 대통령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청와대에서는 그건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달을 보라는데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천박한 말싸움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김원봉을 언급한 것은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직 이 나라엔 이분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모임에서 "그 사람 참 사람도 괜찮고 능력도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이라 찍기가 좀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러야 이런 식의 냉전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래는 김원봉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경향신문 칼럼입니다.
[경향의 눈]우리는 김원봉을 얼마나 알고 있나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독일제국에 합병된 상태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연합국의 분할통치를 받게 됐다. 38선 남북을 미·소가 분할 점령했던 한반도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연합국의 군사정부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공존했다는 점이 달랐다. 패전 직전 노(老)정객 카를 레너가 친나치 계열을 뺀 모든 정파를 아우른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소련을 제외한 3개 연합국은 사회주의 정치가 레너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경계했으나 얼마 안 가 승인했고, 임시정부는 오스트리아 전역에 관할권을 행사하게 됐다. 그해 11월 총선에서 50%를 득표해 제1당이 된 보수계 국민당은 단독정부 수립 대신 사회당, 공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했다. 분단 위기를 딛고 통일독립을 이루려면 정치권이 기득권을 버리고 단합해야 한다는 시국인식이 좌우합작을 가능케 했다.
국민당은 사회주의 정책인 국유화를 수용했고, 사회당도 미국이 주도하는 마셜플랜 참여에 찬성하는 등 정치권은 실사구시의 태도로 국난을 타개해 나갔다. 1955년 주권을 회복하기 전까지의 10년간 오스트리아 정치권의 이념을 넘어선 결속과 협력은 지금 봐도 감탄스럽다. 해방 후 극심한 분열로 날을 지새우다 분단과 전쟁으로 치달았던 한반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계기로 약산 김원봉이 다시 논란의 핵으로 떠올랐지만 문 대통령이 말하려던 것은 ‘김원봉의 복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같은 ‘좌우합작’이었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중략) 광복군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 기득권이나 사익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마음이 애국”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말이라면 무조건 물어뜯고 보는 자유한국당과 보수세력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없으니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 만들려다 폐기된 국정교과서의 고교 한국사에 문 대통령의 추념사와 거의 같은 기술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오마이뉴스 6월7일 보도).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로 결집한 것처럼 중국 관내의 무장세력도 한국광복군으로 결집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한 데 이어, 조선의용대 본부 병력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김원봉은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필진이 보수학자들 일색이던 국정교과서조차 김원봉의 ‘좌우합작’을 평가한 것이다. 1920~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서 가장 혁혁한 업적을 세운 김원봉이 자신의 기반인 조선의용대를 해체하고 광복군에 합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원봉은 대의를 위해 기득권을 내려놨다.
귀국한 뒤 김원봉은 좌익계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는 한편 중도세력의 좌우합작 운동을 지원하다 월북했다.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데 이어 여운형의 피살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월북 뒤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것은 알려진 대로이지만, 납북·월북된 중도파 정치인들과 함께 ‘중립화 평화 통일방안’을 내놓는 등 조선노동당과 다른 노선을 걸으려 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지만 해방 후 정치가들이 오스트리아처럼 좌우합작을 이뤘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좌우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정치인, 기득권 대신 통합을 선택한 정치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미·소와 협상을 벌여나갔더라면 적어도 수백만이 희생되는 전쟁의 참화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사회가 굳이 71년 전 남한 땅을 등진 김원봉을 기억하고 불러내려는 것은, 그의 항일투쟁 때문만이 아니라 통합의 대의를 위해 기득권을 버릴 줄 아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김원봉은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를 좋아했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두루 심취했다. 편협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독립에 필요하다면 누구와도 손잡는 실사구시형 전략가였다. “의열단원은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님 웨일스·김산 <아리랑>)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만주, 상하이, 일본을 종횡무진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공포에 몰아넣은 ‘어벤저스’이면서도 자신의 삶과 일상에 충실한 멋진 청년들이었다. 김원봉을 편협한 이념의 틀에 가둬선 그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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