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김민아 논설위원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늘 그를 응원합니다.
이 나라 정치판은 훌륭한 기자를 집어삼켜 '그들 중의 하나'로 만든 적이 많습니다.
김민아 논설위원은 정치판에 가지 말고 평생 언론인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에게 감사하며 오늘 경향신문에 실린 글을 옮겨둡니다.
[김민아 칼럼]‘양승태 캐슬’의 앞날은
2008년 8월 서울중앙지법 박재영 판사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안진걸 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의 보석을 허가한다. 10월에는 집시법의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다. 관련 사건을 맡은 다른 법관들도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려보자고 한다. 다급해진 신영철 당시 법원장은 판사들에게 e메일을 보내 “현행법에 따라 결론을 내라”고 압박한다. 재판 개입이자 법관의 독립 훼손이다. 이듬해 2월 신 법원장이 대법관에 임명되자 이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한다. 법관 500여명이 각급 법원별로 판사회의를 열어 “재판권 침해”를 비판하고 사퇴를 촉구한다. 대법원장까지 나서 “대법관으로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신 대법관은 6년 임기를 ‘감내’한다. 법원을 떠난 이는 보수진영의 표적이 된 박재영 판사다.
2017년 2월 수원지법 안양지원 이탄희 판사가 법원행정처 기획2심의관 발령을 받는다. 이 판사는 출근 직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법관들을 뒷조사한 파일이 존재하며 그 파일을 관리하는 일이 자신의 직무라는 것이다. 이 판사가 사직서로 저항하자 당황한 대법원은 그를 원직복귀시킨다. 그해 3월 경향신문 보도로 이 사실이 알려지며 사법농단 사태의 서막이 오른다. 법관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법원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를 거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된다. 하지만 수족 노릇을 한 상당수 법관은 여전히 법대(法臺)에 앉아 버티고 있다. 최근 정의당이 발표한 탄핵소추 대상 명단에는 현직 대법관(권순일)도 들어 있다. 권 대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됐음에도 입장 표명이 없다. “내부 거절자로 불려지면 충분하다”(한겨레 인터뷰)는 이 판사는 오는 25일 법복을 벗는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 헌법 위반이라는 중대 과오를 저지른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데, 양심을 지킨 이들이 견디다 못해 떠난다. 가장 정의롭고 공정해야 할 사법부의 민낯이다. 경향신문이 양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을 분석한 결과, 사법농단에 부당 관여한 현직 법관은 65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절반에 가까운 30명은 시효가 지나 징계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미 징계에 회부된 13명 중 8명도 정직·감봉·견책에 그쳤다. ‘물의 야기 법관’ 리스트를 작성하고 동료 판사를 환자로 몰아 인사상 불이익을 받게 한 김모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불문(잘못이 경미해 죄를 묻지 않음)에 부쳐졌다.
“관중은 언제나 피를 원한다. 하지만 판사가 그걸 따라가서는 안된다.” 최인석 전 울산지법원장이 퇴임 전 한 말(중앙일보 인터뷰)이다. 수십년간 세금으로 녹을 먹어온 공직자가 주권자를 ‘관중’으로 깎아내리다니. 한 소장 판사는 “사법농단 사태를 겪으며 일부 고위법관들의 선민의식에 놀랐다. 법관사회가 제대로 견제받아본 적이 없음을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법관의 상식이 시민의 상식과 유리돼 있다는 지적이다.
사법농단 같은 거창한 이슈에만 국한되는 문제도 아니다. 최근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음주운전으로 벌금 100만원의 유죄가 확정되고도 감봉 1개월의 경징계만 받았다. 해당 기사에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연예인은 밥줄 끊기는데 판사는 감봉 1개월이라니” “공무원인데 이런 징계를… 옷 벗어야 되는 것 아님?”. 최근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배우 안재욱씨와 김병옥씨는 출연하던 뮤지컬과 드라마에서 하차했다.
법원과 법관이 누려온 신뢰와 권위는 심판자로서의 위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강요된, 혹은 강제된 신뢰와 권위였다. 그러나 사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며 신화는 막을 내렸다.법원과 법관을 에워싼 아우라는 사라졌다. 이탄희 판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법부가 ‘재판거래는 없었다’고 선언하면 국민들이 그 선언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방식으로 사법 신뢰가 해결될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모은 드라마 <SKY캐슬>의 결말은 허무한 해피엔딩이었다. 캐슬의 시민권을 갈망하던 ‘외부자’ 혜나만 희생되고 ‘내부자들’은 일제히 개과천선하며 행복을 되찾았다. 강렬한 파국을 기대하던 시청자는 집단적 멘붕(멘털붕괴)에 빠졌다. 사법농단 사태의 엔딩은 이처럼 엉성하거나 황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양승태를 감옥에 보냈으니 (나머지 연루자는 신경쓰지 말고) 법원과 재판을 무조건 믿으라’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양승태 캐슬’은 밑바닥까지 무너져내려야 한다. 10년 전과는 달라야 한다. 처절한 파국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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