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저녁 쉬는 시간이면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를 봅니다.
미국의 정치판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왜 저희 아버지가 늘 '정치는 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정치판엔 나라의 안녕이나 국민의 삶과는 무관하게 권력만을 좇는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영국 BBC의 미니시리즈를 각색해 만든 드라마로 2013년 2월부터 2018년 11월까지
방영됐습니다.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주연인 케빈 스페이시(Kevin Spacey)의 성범죄 혐의가 불거져
하차하면서 시즌6로 서둘러 마감된 것 같습니다.
어제 경향신문에 김희연 문화부장이 쓴 글에는 넷플릭스를 봐야 '핵인싸'라고 합니다.
'핵인싸'는 '핵폭탄 급으로 크다'를 뜻하는 '핵'과, 인사이더(insider)의 합성어로,'트렌드에 강하고
무리 속에서 잘 지내는 사람'을 뜻하는 요즘 말입니다.
저는 김 부장의 글에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과 같은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지만
성(性)과 나이에 근거한 고정관념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정의하는
한국 사회가 후진적이라는 데는 백번 동의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 고정관념의 피해자이니까요.
[아침을 열며]젊은 여성들이 넷플릭스를 보는 이유
“이젠 한계에 도달해서 엄마 역할 그만 좀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역할에 비해 기회가 많지 않았죠” “무모한 도전이 아닐까, 그래도 내 또래 여배우에게 희망이 되지 않을까요?”….
올해로 연기경력 47년, 45년, 37년차에 접어든 배우 박정수, 김보연, 박준금의 고백이다. 이들의 할리우드 도전기를 담은 tvN 예능 프로그램 <할리우드에서 아침을>은 이 같은 말로 첫 방송을 시작한다. 할리우드 오디션에 도전하기 위해 영어 대사를 외우고 셀프 테이프를 만들며 좌충우돌하는 얘기다. 24일 방송에선 LA의 대형 에이전시를 찾아가 오디션에 참여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새로운 도전에 가슴 설레어하다가도 영어 울렁증에 ‘내가 미쳤지, 왜 한다고 나서서’ 속으로 후회도 하고 서로 예민해져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이들이 사서 고생에 나선 이유는 뭘까. 단 한 가지, 여배우라는 이유로 95회 드라마 중 72회를 엄마 역할만 하고(박정수), 그마저도 아들에게 집착하는 엄마이거나 악독한 시어머니 아니면 속없는 시누이로 소비돼온 자신들에게 배우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주고 싶어서다. 현재 영화 촬영도 병행하고 있는 김보연은 “(45년 만에) 판사 역할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김보연은 할리우드 진출용 셀프 테이프를 만들며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리프가 연기한 뉴욕 패션 잡지사의 에디터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대사 한 장면을 연기한다. 이혼을 통보받은 순간 딸들을 걱정하는 엄마이면서도 다가온 대형 행사 준비에 몰두하는 대목이다.
세 배우의 할리우드 도전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응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남자 동료배우는 ‘대한민국 배우로서의 자존심’ 운운하며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말한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배우가 왜 할리우드에서 기껏 작은 역할이라도 따내려고 애쓰는가,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2~3분짜리 단역이라도 난 캐스팅된다면 할 거야”라고 말하는 47년차 배우 박정수에게는 못다 보여준 ‘천의 얼굴’이 아직도 많으리라. ‘국민엄마’로 살아온 배우 김혜자가 소름끼치는 그의 연기력으로 엄마 아닌 다른 스토리의 주인공이 돼 연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더 멋질까(최근 김혜자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어느 날 갑자기 스물다섯에서 70대 노인이 된 여성을 연기하며 호평받고 있다).
어찌 보면 무모하리만큼 힘겹게 보이는 이들의 할리우드 도전은 ‘콘텐츠 공룡’으로 불리는 넷플릭스(유료 인터넷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가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콘텐츠 공룡이란 닉네임은 세계 시청자를 상대로 한 넷플릭스의 막대한 영향력과 자본력을 상징하고 있지만 그보단 다양한 콘텐츠에서 비롯됐다.
특히 출판은 물론 문화 콘텐츠 전반에서 가장 유력한 소비층인 20·30대 젊은 여성들의 인권이나 젠더 감수성 눈높이에 맞는 콘텐츠가 풍성하다. 무려 20명이 넘는 여주인공들이 번갈아 나오며 시즌7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오뉴블)은 젊은 여성들 사이 자주 화제에 오른다. 뉴욕 연방 여자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 여성들의 서사가 중심인 드라마다. 자극적인 요소가 많아 낯설 법도 한데 입체적인 캐릭터의 여성들이 떼로 나와 그들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모습이 새로운 경험을 안겨줘 재미있다는 것이다. 한 20대 여성 시청자는 “<오뉴블>이 재미있는 이유는 안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관객 1500만명(24일 기준)을 넘어선 영화 <극한직업>의 인기 요인들 중 하나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 영화에서 배우 이하늬가 맡은 장형사는 여배우에게 숙제처럼 주어지는 멜로에서 벗어나 마약반 형사로서의 활약이 주된 캐릭터다.
같은 이유로 ‘집밥을 만들며 평생을 살아온 손맛 넘치는 할머니들…’을 내세운 KBS 2TV <삼청동 외할머니>는 어딘가 불편하다. ‘할머니(또는 여성)=집밥=자식사랑’과 같은 낡은 틀이 다양한 음식으로 세계 문화와 만난다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감수성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인생은 왜 집밥의 성찬으로 포장되어야 하나.
요즘 어느 자리를 가든 넷플릭스가 자주 화제에 오른다. 넷플릭스의 시청 여부가 ‘핵인싸’(주류를 뜻하는 신조어)를 가르는 잣대처럼 얘기된다. 마치 ‘힙하다’는 종로구 익선동의 카페나 클럽에 가봤냐처럼.
진짜 핵인싸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넷플릭스가 유력한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감각을 이해하고 함께 호흡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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