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조 있고 아름다운 말, 욕을 할 때조차 노골적이지 않은 말, 무엇보다도 유머...
말은 교양인의 척도라지만 이제 품격 있는 한국어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외국인의 한국어가 더 정확한 경우도 많습니다.
한국인들은 영어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도
한국어를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상합니다.
사전도 국어사전은 아예 보지 않고 가끔 영어사전이나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수라장 같은 정치판의 언어는 오래전부터 왜곡되고 변질됐으나
노회찬 전 의원만은 품위 있는 우리말에 유머를 버무려 국민을 웃게 했습니다.
오늘 경향신문 여적 칼럼에 이대근 논설고문이 쓴 글에서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적]노회찬, 떠나다
요즘 국어사전을 펼쳐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라서 그렇기도 하고, 영어 아닌 한국어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매일 국어사전을 읽는 사람이 있다. 아니, 있었다. 오래전부터 국어대사전을 탐독해왔다는 그는 읽을수록 한국어의 깊이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간혹 술을 먹고 늦게 귀가하는 경우에도 국어사전만은 꼭 읽고 잠들었다.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이 특이한 정치인의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세상 사람들은 노회찬의 촌철살인·유머가 그저 타고난 재능이겠거니 했다. 그가 한국어를 얼마나 갈고닦았는지는 모르고 있다. 보통 정치인과 달리 그가 적확한 용어와 단어로 상황을 정의하고, 적절한 분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어에 대한 오랜 집착의 결과이다.
나쁜 정치로 한국어를 망치는 정치인은 많지만, 노회찬처럼 우아한 한국어로 좋은 정치를 추구한 정치인은 드물다. 그런데 그마저 떠났다. 자신의 말을 지키느라, 기꺼이 목숨을 내준 것이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정치조직을 위해 쓰려고 아껴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떠난 그가 밉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27일 영결식에서 “약자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 가능성 하나를 상실했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깨달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네.” 노회찬이 떠나는 날 밥 딜런이 왔다. 평화와 자유를 노래해왔던 밥 딜런의 서울 공연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스러진 영혼을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시민들은 그동안 외면하던 진보정치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고 있다. 심상정도 “당신을 잃은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언젠가 진보정치가 꽃피는 날 진보정치 깃발을 맨 먼저 들었던 노회찬을 세상 사람들은 기억해줄까? 영화 <동사서독>에서 장만옥은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장국영을 그리며 말한다. “내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름다운 시절이 와도 그와 함께하지는 못한다. 노회찬의 부재는 상실이자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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