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구본무 회장과 오현 스님(2018년 5월 31일)

divicom 2018. 5. 31. 10:14

누군가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난 후 그이를 한 번이라도 만났어야 하는데 하며 가슴을 칠 때가 있습니다. 지난 5월 20일에 별세하신 LG그룹 구본무 회장,  지난 26일 속초 신흥사에서 입적하신 오현스님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두 분이 살아계실 때 소리 없이 보여주었던 행적이 돌아가신 후 사람들을 울리고 있습니다.  

 

뒤늦게 언론을 장식하는 구 회장의 선행과 따스함은 책으로 쓰고도 남을 정도인데, 그는 따스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돈을 쓸 줄 아는 부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구 회장은 새를 관찰하는 탐조가였는데 탐조활동을 위해 외국 도감을 갖고 갈 때마다 우리 조류도감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다 2000년에 엘지상록재단을 통해 <야외 원색도감 한국의 새(한국의 새)>를 발간함으로써 마침내 소망을 이뤘고, 이 책은 한국 탐조 역사에 큰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구 회장 떠나시고 열흘이 지났지만 그분을 추모하는 사람들과 그분이 표나지 않게 실천했던 사랑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큰 박수를 보내드리지 못한 게 송구스럽습니다.

 

어제 아침 속초 신흥사 다비식에서 불꽃이 되신 오현 스님(무산 스님)도 그런 분입니다.  스님은 26일 오후 5시 11분, 승려로 보낸 60년과 세상 나이 87세를 두고 입적하셨는데, 대통령부터 각계각층 사람들의 울먹이는 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7일 페이스북에 “불가에서 ‘마지막 무애도인’으로 존경받으셨던 신흥사와 백담사 조실 오현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저는 그의 한글 선시가 너무 좋아서 2016년 2월 4일 ‘아득한 성자’와 ‘인천만 낙조’라는 시 두편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다. 스님께선 서울 나들이 때 저를 한번씩 불러 막걸리잔을 건네 주시기도 하고 시자 몰래 슬쩍슬쩍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시기도 했다. 물론 묵직한 ‘화두’도 하나씩 주셨다”며, “언제 청와대 구경도 시켜드리고, 이제는 제가 ‘막걸리도 드리고 용돈도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얼마 전에 스님께서 옛날 일을 잊지 않고 ‘아득한 성자’ 시집을 인편에 보내오셨기에 아직 시간이 있을 줄로 알았는데, 스님의 입적 소식에 ‘아뿔싸!’ 탄식이 절로 나왔다”라고 했습니다.

 

오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의 뒤를 이은 시조시인으로 1966년에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하고 백담사 인근에 ‘만해마을’을 조성하기도 했는데, 입적을 앞두고 시인다운 열반송을 남기셨습니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그러나 오현 스님에 대한 무수한 찬사보다 더 저를 감동시킨 건 지난 29일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 글을 아래에 옮겨두며,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집니다. 그러면 이승에서 뵙지 못한 구 회장과 오현 스님을 저승에서 뵐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삼가 두 분의 자유와 평안을 빕니다.

 

오현 스님은 장애예술인의 구원투수였다

방귀희 |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이승의 옷을 벗고 홀연히 떠나신 백담사 오현 큰스님께서 지난해 필자에게 하신 당부이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을 이제 밝히려 한다.

2017년 봄 어느 날 아침 스님의 문자를 받았다. 지금 서울에 있으니 잠시 보자는 내용이었다. 노령의 스님께서 문자를 하실 줄 안다는 것이 신기해서 혼자 미소지으며 스님을 뵐 수 있다는 기쁨에 한숨에 달려갔다. 스님은 건물 밖에서 휠체어를 타고 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10년 만에 뵌 스님은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이미 세속의 모든 번뇌를 다 털어낸 성자의 모습이었다. 스님은 시조시인으로 시집을 여러 권 낸 문인이어서 그런지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에 관심이 많으셨다.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솟대문학’이 폐간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위로해 주셨다. 스님이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물으시기에, ‘장애예술인지원법률’을 만들어 장애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과업이라며 마치 나라를 구하는 독립군이 된 양 의기양양하게 말씀드렸다. 내 대답에 스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며칠 후 스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법이 제정되려면 시간이 걸리니 장애예술인 60명에게 월 3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스님은 종교가 타 종교여도 상관 없고 그저 열심히, 어렵게 창작활동을 하는 장애예술인이면 장학금을 줘야 한다며 6개월분을 한꺼번에 개인 통장으로 입금시켜 주셨다.

이 지원금을 보내며 하신 말씀이 바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불교에 ‘무주상 보시’라는 것이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익명의 기부인데 무주상 보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머물지 않고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한층 차원 높은 자선이다. 스님의 무주상 보시는 우리 장애예술인뿐만 아니라 어려움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루어졌다. 좌초 위기에 있던 사업이 스님 덕분에 시작될 수 있었다는 후일담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스님은 격의 없이 막걸리 잔을 건네며 고통 속에 있는 중생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던 구원투수였다.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던 스님께서 훌쩍 떠나니 허망하고 또 허망하다. 이렇게 가시려고 지난해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셨구나 싶어서 스님의 무주상 보시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스님의 입적 소식에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스님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신 글을 보니, 스님의 높은 인품이 다시 한번 빛난다. 흔히들 높은 사람과 친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자랑 삼아 얘기하지만 스님은 일절 그런 상(相)을 내세우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도 나라 걱정만 하셨다. 세상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서 그것을 풀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고 하시며 “다들 장애인이다. 나도 장애인이고”라던 말씀이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의 화두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념, 지역, 세대 간 갈등이 우리 삶에 장애 요소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갈등으로 대결할 것이 아니라 나도 부족하다는 자기고백으로 장애 요인을 없애 서로의 구원투수가 되라는 의미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조건 없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하는 오현 큰스님 같은 소박한 구원자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292058015&code=990304#csidx1479e2ae5dc9f798ec5207d31b5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