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불면, <맥베스>, 사막 달팽이(2018년 2월 3일)

divicom 2018. 2. 3. 07:27

어린 시절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을 자서 그런 걸까요?

성인이 된 후로는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눕자마자 잠드는 룸메이트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늘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그렇게 빨리 잠들 수 있는 건 그에게 '죄가 없기(innocence)' 때문이며

제가 빨리 잠들지 못하는 것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면이 늘 부끄러웠습니다.


요즘도, 아플 때를 빼고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일도 많습니다.

그저께 밤에만 해도 꿈에서 숱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엔 2년 반 전 돌아가신 아버지도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꿈에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막에서 사는 달팽이도 있잖아."

그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었는지는 떠오르지 않고 그냥 그 한 구절만 떠오릅니다.


꿈에서 그 말씀을 들을 때까진 한 번도 '사막의 달팽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막' 하면 바람과 모래 능선, 그 능선을 터벅터벅 걷는 낙타를 떠올리곤 했는데 달팽이라니요!


구글링을 해보니 정말 사막에 사는 달팽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과 이집트의 시나이 사막에서

흙을 먹으며 사는 달팽이(Sphincterochila boissieri)가 있다는 겁니다.


생전에도 늘 새로운 것을 알려주시며 저를 일깨우시던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제 스승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사막의 달팽이' 얘기를 하신 건

살아가는 게 고단하다는 제 말씀을 들으신 후인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사막의 달팽이를 생각하겠습니다.


다시 잠 얘기로 돌아가지요.

어제 세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를 읽다가

'죄 없는 자만이 잠들 수 있다'는 저의 결론을 발견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 던컨을 살해하고 난 맥베스가 하는 말입니다.



"맥베스는 잠을 죽였네, 무고한 잠을,

근심으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주는 잠,

하루치 생의 죽음, 노동의 아픔을 씻어주는 목욕,

상처난 마음을 위로하는 향유, 위대한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방책,

생을 축제로 만드는 최고의 자양분."

 

"Macbeth does murder sleep, the innocent sleep,

Sleep that knits up the ravelled sleave of care,

The death of each day's life, sore labour's bath,

Balm of hurt minds, great nature's second course,

Chief nourisher in life's feast."


 

손바닥만 한 페이퍼백 <Macbeth>의 맨 뒷장 안쪽 잘 보이지 않는 아래 귀퉁이에

'1978.9.10 khs'라는 서명이 보입니다. 늘 잠을 설치던 신문기자 시절,

어떤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들었을 토끼눈이 꿈 속 사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