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르 클레지오의 <빛나>, <폭풍우>(2017년 12월 15일)

divicom 2017. 12. 15. 11:28

어젠 오랜 인연 덕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의 기자회견을 구경했습니다.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엔 그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송기정 이화여대 교수와, 

그 책을 영어로 번역한 브라더 앤써니(Brother Anthony of Taise), 그리고 3,40명의 기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르 클레지오는 스물세 살에 <조서>라는 첫 소설로 프랑스에서 르노도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대뷔했고, 

그후 거의 매년 한 권씩 책을 내다시피한 작가이지만, 저는 그의 책을 별로 읽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의 책뿐만 아니라 책 자체를 많이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정직할 겁니다.

그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어서이기도 했고, 

좋은 글이나 베스트셀러, 박수 받는 책들에 대한 각기 다른 질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정독한 건 그가 지난 10월에 '제주 우도의 해녀들에게'라는 헌사를 곁들여 내놓은

<폭풍우>가 처음입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중편으로 <폭풍우>라는 제목의 책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뒤에는 <신원불명의 여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폭풍우>를 읽는 동안 저는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생래적으로 물을 두려워해서 한여름에도 바닷가에 가는 일이 드무니까요.

바다는 아주 좋아하지만, 바다의 인력 -- 끌어당기는 힘 --을 거부할 자신이 없어서 가지 못하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바다로 걸어들어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늘 궁금해 합니다.

<폭풍우>를 읽다 보니 바다에 대한 저의 두려움이 저로 하여금 얼마나 큰 세계 하나를 모른 채 

살아가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 저를 부끄럽게 한 건 한국, 제주, 우도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글을 써온 작가는 2001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2007-8년에는 이화여대 불문과와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좌교수로 강의하기도 했는데, 

제주 우도를 배경으로 한 <폭풍우>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 <빛나: 서울 하늘 아래>를 읽다 보면 

한국에 대한, 혹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부끄러움은 그의 성실성이 일깨워준 것입니다.

그는 20대 초입에 세상의 인정을 받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열심히 씀으로써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습니다.

그의 연보를 보면 그 어느 해도 허송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11일 출간된 <빛나>는 서울의 대학에 입학한 19세 전라도 어촌 출신 소녀가 주인공으로

이 소설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촌과 이대입구, 서래마을, 용산, 홍대, 오류동, 과천, 경복궁, 인사동 등

서울의 구석구석이 등장합니다.


연말 분위기에 들떠 낮보다 환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폭풍우>와 <빛나>를 읽으며, '뛰어난 작가의 손에서 재탄생한 제주와 서울의 모습을 음미하는 것은 

더 재미있고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우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노벨문학상 덕에 집 사느라 진 빚을 갚았다고 하는 작가,

노벨상을 받은 후에도 삶은 변한 게 없고 여전히 자신 앞에는 컴퓨터와 종이뿐이라고 말하는 작가,

'성실이 천재의 제일 가는 덕목'임을 보여주는 이 작가를 직접 볼 수 있었으니 

<빛나>와 <폭풍우>를 출간하고 어제의 자리를 마련해준 출판사 서울셀렉션에 감사합니다.

 

아래는 오늘 경향신문에 실린 어제 기자회견 기사입니다.   

기사 말미 '원문 보기'를 클릭하면 77세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작가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은 곳곳에 이야깃거리 감춰둔 역동적인 도시”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서울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시입니다. 움직이는 도시입니다. 오래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대 이야기도 생성되는, 풍부한 이야기가 탄생하는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대표 작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7)는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열린 신작 <빛나-서울 하늘 아래>(서울셀렉션) 출판 기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빛나-서울 하늘 아래>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2001년 처음 서울에 온 르 클레지오는 이후로도 한국을 자주 찾은 ‘지한파’ 작가로 꼽힌다. 르 클레지오는 앞서 제주 해녀들을 소재로 한 소설집 <폭풍우>를 출간했다. 10년 전 이화여대에서 1년간 석좌교수를 지낸 그는 “언젠가는 서울을 배경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말해왔다.

르 클레지오는 “10년 이상 서울에 자주 오면서 뭔가 쓰고 싶었는데 여행기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들었던 실제 이야기, 꾸며낸 이야기,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소설에 실제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고 했다. 소설의 제목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누군가 “언젠가 서울에서 다시 만나리”라고 말한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굉장히 낙천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빛나-서울 하늘 아래>는 전라도 어촌 출신 19살 소녀 ‘빛나’가 주인공이다. “빛나에게도 서울은 낯선 도시입니다. 빛나는 우연히 불치병을 앓는 여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합니다. 빛나가 이야기를 상상하고 만들어냅니다. 그 안에 서울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르 클레지오는 서울 곳곳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엔 이대 근처에 있는 나무로 된 작은 집에 있었던 ‘점쟁이’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 새벽녘 파티가 끝난 신촌 거리에서, 종이 박스를 모으는 노인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라는 생각에 그들을 따라가보고 싶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에는 신촌과 이대 입구의 골목길부터 방배동 서래마을, 강남, 오류동, 용산, 홍대, 당산동, 과천의 동물원, 충무로, 종로, 명동, 영등포, 여의도 등 서울의 곳곳이 등장한다. “소설에 등장한 모든 장소는 직접 가본 곳이에요. 지하철과 버스 타길 좋아합니다. 지하철과 버스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이 겪는 일들, 어려움들을 읽는 데 좋은 수단입니다.” 

그는 “서울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간성의 상실을 겪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도심 안에 작은 집들, 절들,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는 게 좋다”면서 “특히 끈끈한 정으로 유대관계를 맺는 서울 사람들이 좋다. 집 앞마당에서 야채를 기르는 정겨움이 좋다”고 말했다. 르 클레지오는 그러면서 “그렇다고 서울이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도시라는 얘기가 아니다. 위험한 도시이기도 하다”면서 “소설에 ‘스토커’ 이야기가 들어 있다.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공포 같은 것들도 소설에 담았다”고 했다. 

이번 소설은 한국어판으로 먼저 출간되고 이달 중 영문판이 나온다. 내년 3월엔 프랑스에서도 출간된다. 한국어로 옮긴 송기정 이화여대 교수는 “이번 소설도 르 클레지오의 다른 소설처럼 굉장히 슬프다. 삶과 죽음이 만나고 고통과 고뇌가 있고 가난이 있다. 슬픔을 결코 무겁지 않은,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표현한다. 르 클레지오만의 놀라운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42122015&code=100100#csidx2196e9045dbdfb1866aa534f2f3df3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