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속에서도 봄은 오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자유칼럼에서 보내준 김수종 선배님의 글에선
매화 향기가 납니다. 엊그제 산책길에서 본 목련 봉오리들도 생각납니다. 부디 무사히 봄을 맞이하기를...
| | | | | 1월 초순 제주도에 사는 지인과 전화로 새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메시지를 전한 다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날씨 얘기가 나왔습니다. 지인은 한라산에 눈이 하얗게 쌓였고 날씨도 고르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지인은 느닷없이 꽃소식을 전했습니다.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어제 골목 어귀에 하얗게 핀 것을 보았습니다.”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에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직 초겨울인 줄 알았더니 벌써 매화가 피었다는 얘기에 갑자기 계절을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지 전에 피는 조매(早梅)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것 같으나, 매화 하면 역시 입춘이 지나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서울이 아니라 제주도이고 요즘 기후변화로 날씨가 뒤죽박죽되고 있으니 매화 나무도 정신 차리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봄바람에 뜰 안의 매화가 맨 먼저 피어나고(春風先發苑中梅) 앵두, 살구, 복숭아, 자두 꽃이 차례로 핀다 (櫻杏桃李次第開)“ 당나라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읊었듯이 매화는 봄의 전령(傳令)입니다.
매화 소식을 들으니 거실 책상 위에 놓인 빈 다완(茶碗)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차 사발이야말로 내가 매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해준 그릇입니다.
제주도에 송충효라는 70대 중반의 도예가가 있습니다. 한때 초등학교 교사였다가 도예에 마음을 두고 밤이나 낮이나 흙을 만지며 삽니다.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그는 마루에 앉아 흙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의 도예를 평할 안목이 전혀 없습니다만 그가 빚은 그릇의 두 가지 물리적 특징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릇을 구울 때 쓰는 유약을 만들면서 제주도산 재료, 즉 귤나무 또는 귤잎을 배합합니다. 그래서 그의 다완 색깔에서는 제주도 색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만든 다완은 정말 탐스럽게 매끈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투박합니다. 개발되기 전 제주도의 색깔과 오름 등 자연의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가마 속에서 구울 때 유약이 흘러내리다 굳어서 그릇 결이 옹이처럼 울퉁불퉁합니다. “눈을 감고 만져 보세요.” 그의 그릇은 시각보다 촉각에 중점을 두고 빚어진 듯합니다.
10년쯤 전 지인과 함께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뜨락에 눈이 쌓인 겨울이었습니다. 잠시 얘기를 하던 중 그는 별실로 가더니 차 사발을 세 개 갖고 나와 각자 앞에 하나씩 놓으면서 “차나 한잔 합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 앞에 놓인 다완은 그 결이 마치 주상절리 같았습니다.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자 그는 뒤뜰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니 뜰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들어온 그의 손엔 매화꽃이 여러 송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펄펄 끓인 물을 다완에 붓고 그는 매화꽃을 서너 송이씩 띄워 넣었습니다.
커피나 한잔 줄 것이지 맹물에 꽃을 넣으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두 손으로 사발을 들고 입에 대려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향기를 맡았습니다. 매화 향기에 정신 못 차리는 나에게 그가 말했습니다. “보아하니 사기그릇 값도 낼 형편이 못 되는 것 같은데... 사발을 보고 작가의 혼이 있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시오. 흙에 무슨 혼. 그냥 '사기'일 뿐이오.”
사실 그때까지 매화꽃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사람들이 찬탄할 때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그날 맡은 마약 같은 매향 때문에 매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황벽선사가 남긴 게송(부처의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不是一番寒徹骨 (찬 기운이 한 번 뼛속을 사무치지 않았다면) 爭得梅花撲鼻香 (어찌 매화가 코 찌르는 향기를 얻었으리오)
매화 향기를 갖고 이렇게 인생을 포괄하는 비유를 한 문인이 있다는 게 정말 감동적입니다. 간혹 학생들을 상대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때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무 감동이 없습니다. 요즘 대다수 학생들이 꽃에 관심도 없고 특히 겨울에 매화를 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 향기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눈 속에 핀 매화꽃이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그 향기가 짙기 때문입니다. 아직 입춘은 안 됐지만 매화가 피었다는 꽃 소식은 반갑습니다. 서울의 어느 집 뜨락에도 지리산 자락에도 매화가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을 것입니다. 올해는 책상 위에 빈 채로 두었던 차 사발에 매화 꽃잎을 띄워 그 짙은 향기를 맡아보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탁합니다. 보기도 싫고 숨쉬기도 거북합니다. 향기라곤 맡아 볼 수 없습니다. 국정농단, 특검, 탄핵, 청문회 등 빙하기 같은 정국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칼자루를 쥐었던 사람, 쥐고 있는 사람, 새로 쥘 사람들이 범벅이 되어 어지럽습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마치 뼈속에 사무치는 찬 기운에서 코끝을 찌르는 매화 향기가 생성되듯이, 이 탁한 사회분위기를 뚫고 향기가 좋은 리더가 튀어나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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