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오늘 밤 9시 뉴스 (2007년 6월 7일)

divicom 2009. 11. 17. 00:08

다 잊은 줄 알았던 1980년 5월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요즘 9시 뉴스에서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언론” 때문에 성난 대통령 얼굴을 자주 보아서인가 봅니다.

그 해 5월 17일 비상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후 밤낮으로 시청에 차려진 언론 검열단에 대장*을 들고 가 오케이를 받아야 했습니다. 누구나 가기 싫은 검열단, 기자들은 순번을 정해두고 검열 당번을 했지만 선배들은 자꾸 젊은 여기자들을 보냈습니다. 여기자가 가야 검열관들이 좀 봐줄 거라고, 기사에 삭제를 나타내는 빨간 돼지 꼬리가 덜 달릴 거라고.

그 고통스럽던 날들이 지나고 27년이 흘렀습니다. 전직 민주투사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지만 사감私感과 사리私利가 정책의 부모 노릇을 하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달 22일 발표된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또한 사적인 감정과 견해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기자 노릇을 하던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 각 정부 기관의 기자실엔 기자단이라는 게 있어 원한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기자단에 속해 있는 기자들이 새 “회원”을 받아들일까 말까를 결정했고 부처의 공무원들은 자기네 기자단의 눈치만 보았습니다. 기자단에 가입하지 못한 기자는 자연히 부처가 제공하는 정보로부터 배제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의 주요 언론사들이 이번 결정에 대해 한 목소리로 반대하는 데 비해 인터넷 언론과 지방 언론사들이 침묵하거나 찬성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어떤 식의 불평등이 아직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2003년 노 무현 대통령이 기자단을 없애고 개방 브리핑 제도를 도입한 후엔 출입기자가 100명을 넘는 부처가 여럿이라고 합니다. 출입기자는 이 사무실, 저 사무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공무원들 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각 부처 기자실에서 수십 년 동안 권력과 편의를 누려 온 주요 언론사들이 “취재 지원… 방안”에 심하게 반발하는 건 당연합니다. 신생 인터넷 매체들이나 지방 언론과 똑 같은 방식으로 취재원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기본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인터넷 언론의 기자를 자처하며 진짜 기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기사 아닌 기사를 쓰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진실로 우리 언론을 “선진화”하고자 이 방안을 내놓았다면 그 이유를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기자실은 기자들이 담합하는 공간이다, 언론이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자들은 기자들대로 왜 정부의 조치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지 설명해야 합니다. 매일 자유롭게 정부와 대통령을 비난하는 언론이 탄압 받는다고 하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부는 취재를 기피하는 공무원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기자들에게 어떻게 그런 행태를 막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약속해주어야 합니다.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방안이 “기자는 멀리 할수록, 상관은 가까이 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미꾸라지 공무원들을 양산하거나 이롭게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 언론은 지난 20년 동안의 민주화와 그로 인해 야기된 사회 도처의 성역 파괴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누려왔습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 언론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적이 언론사 바깥보다는 그 내부에 있는 게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그 적은 시사저널의 기자들을 밖으로 내몬 것과 같은 편집권 침해를 비롯한 언론사 내부의 검열입니다. 이런 기사가 나가면 회사에 해가 되니까, 사장이 화를 내니까, 광고가 줄어드니까 등, 너무도 많은 사내검열이 존재합니다.

“취재 지원… 방안”이 발표된 후 정치 싸움터가 되어버린 뉴스 시간, 오늘 밤 9시 뉴스는 이렇게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에 대해 좀 더 논의하기로 동의했습니다. 노 무현 대통령은 어제 현충일을 맞아 국립묘지를 참배한 후 언론계 대표들과 머리를 맞대고 …”

*대장: 컴퓨터 편집이 도입되기 전 글자를 채자하여 만든 초벌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