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오래 기다려온 실수 (2007년 4월 12일)

divicom 2009. 11. 16. 23:59

아이는 귀가 밝았습니다. 모차르트 이름을 모르던 대여섯 살 때도 더 어려서 듣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직 (Eine Kleine Nacht Musik)”을 들으면 귀를 쫑긋 세우며 좋아했습니다. 아이는 커가면서 온갖 악기 소리가 어울려 만드는 오케스트라 음악과 시나위에 끌렸습니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교육 제도와 싸우던 사춘기 시절엔 주로 헤비 메탈을 들었지만, 판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눈물 흘린 적도 있었고, 포크 음악과 운동 가요를 들으며 부모 시대의 감성에 젖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는 무엇보다 바흐와 “서편제”와 보노가 이끄는 아일랜드의 그룹 “U2”를 좋아했습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살아있는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막 고치에서 깨어나 날개를 말리는 나비들, 온종일 시멘트 벽을 기어오르는 달팽이들, 말캉말캉한 연두색 몸에 솜털이 덮인 송충이 애벌레들, 그야말로 새벽부터 황혼까지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들, 그들을 여러 시간씩 지켜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의 손에서 토실해진 달팽이들, 나무 젓가락만하게 자란 지렁이들도 있었습니다. 금붕어는 물론 병아리, 토끼, 강아지, 사슴벌레까지, 아이는 숱하게 많은 생명체의 보모 노릇을 해보았습니다. 밤에 왕성한 하늘소와 사슴벌레를 찾아 오래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산소를 한밤중에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벌레를 잡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고 벌레를 구해내어 놓아준 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여느 부모들 같지가 않았습니다. 훈육은 무서웠지만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지 않고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죽을 만큼 위험한 일 아니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 아니면, 무엇이든 해보라”는 어머니 덕에 다른 아이들보다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 입시를 앞둔 아이는 고민했습니다. 음악 공부도 하고 싶고 생명 공부도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는 생명을 택했습니다. 생물학과를 갈까 하다가 생명과 현대 과학의 접점이 궁금해 생명공학과로 갔습니다.

그러나 생명공학과는 생명보다 공학이 우선하는 곳이었습니다. 공학이 맞지 않아 괴로운 아이에게 음악은 언제나 제일 좋은 친구였습니다. 아이는 작은 오케스트라라는 기타에 깊이 빠져 들었습니다. 미국의 음악 잡지에서 본 아름다운 기타가 잊혀지지 않아 한밤중에 동네 공중전화에서 기타 회사에 전화를 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 거는 국제전화는 요금이 꽤 비쌌거든요. 짧은 통화였지만 그날 밤 아이는 두 가지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그 기타가 너무나 비싸다는 것. 삼천 칠백 육십오 불이나 했으니까요. 당시 환율로 500만원 남짓이나 되었습니다. 둘째는 전화를 받은 미국 사람이 너무도 빨리 “Three thousand seven hundred sixty five dollars”라고 하는 바람에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는 것. 아이는 중, 고등 학교에서 배운 영어가 미국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영어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덕택에 세계 곳곳의 공방에 주문을 내어 부품들을 구했고 그것으로 아름다운 기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아이는 그 기타를 푸르게 칠하여 “Ocean,” 즉 “바다”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어느새 청년이 된 아이는 군대에 가야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산처럼 쌓여 있는데 그 일들을 2년 이상 미뤄 두어야 한다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가기 싫은 마음과 혹시 안 갈 수는 없을까, 요행을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보니 대학 3년이 끝나 있었습니다. 아이는 논산 훈련소를 거쳐 강원도 고성에서 2년여를 보냈습니다. 동기 하나 없이 홀로 배치된 이등병 시절은 그야말로 나날이 시험 같았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고참들에게 총을 난사해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순 없으니 내 발등에 바위를 떨어뜨릴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를 만류한 건 자신을 기다리는 부모와 음악이었습니다. 군복무를 끝낸 후의 자유를 꿈꾸며 아이는 기타 없이 기타를 연습하고 엠피쓰리 없이 음악을 들었습니다. 군대에서의 서열이 높아지면서 한 달에 서너 권씩 국내외의 음악 잡지를 보았습니다.

병장으로 제대한 아이는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여 음악을 가르쳐줄 선생님을 구했습니다. 구하면 찾는다는 말처럼 꼭 자신에게 맞는 스승이 나타났습니다. 공학을 공부한 후 음악의 길에 들어선 선생님은 누구보다 아이를 이해하고 인정해주었습니다. 선생님에게서 개인 교습을 받는 한편 대중 음악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년 교육 과정의 학생이 되었습니다. 혼자 익힌 음악 이론과 손기술이 전문적 교육 덕에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일년 과정의 끝을 기념해 아이는 생애 최초의 음반을 만들었습니다. 작곡, 연주, 녹음, 표지 디자인, 포장까지 전 과정을 제 손으로 해낸 음반에 “오래 기다려 온 실수(A Long-Awaited Mistake)” 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썼습니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훗날엔 실수의 묶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게 될지라도. 무모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난 나의 첫 항해를 즐겼으니. 실수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건 추억의 열쇠를 주조하는 것, 아무리 먼 미래에도 그 열쇠는 나를 처음 시작하던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아이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주 멀다는 걸. “음악을 하려면, 죽으러 가던 사람이 그 음악을 듣고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드는, 그런 음악을 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이제 첫 발자국을 떼었지만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