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오래된 뜨락 (2007년 03월 06일 (화)

divicom 2009. 11. 16. 23:52

선배님과 헤어지고 일곱 시간 남짓이 흘렀습니다. 제법 온화한 햇빛이 노닐던 거리엔 서늘한 밤이 사금파리처럼 깔려 있습니다.

 

선배님, 혹시 깨어 계세요?
선배님과 함께 했던 두 시간 반 동안 오래된 뜨락을 거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래된” 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신다고요? 하지만 선배님, 오래되지 않은 뜨락은 새 책만 빼곡한 서적 코너 같은 것 아니겠어요? 무엇보다 그곳엔 고여 있는 시간이 없으니 시간이 빚어내는 향내 대신 상품의 냄새만 가득합니다.

오래된 뜨락엔 켜를 이룬 시간이 흥건하니 향내도 추억도 넘쳐납니다. 여름, 가을, 겨울, 스러진 자리엔 초록 싹들이 뾰족뾰족 수줍게 솟고 죽어가는 것들과 태어나는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동무입니다. 선배님의 검은 머리칼들이 반짝이는 은실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처럼요.

오래된 뜨락을 거닐다 보면 으레 잊었던 시들이 그립습니다. 선배님과 헤어진 책방 한쪽 사람 뜸한 곳에서 밤하늘 빛 시집을 만났습니다. 선배님 가시기 전 눈에 띄었으면 바로 한 권 사드렸을 텐데… 혼자 애석해했습니다. 청년 시절 선배님 눈에서 볼 수 없었던 아스라한 슬픔이 꼭 그 빛깔일 것 같았거든요. 그 어두움, 어떤 상실 때문일까,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배님, 혹시 무엇을 잃으셨다 해도 슬퍼 마세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아주 떠나가는 법은 없으니까요. 우리 눈에서 사라지는 순간 오히려 우리 안에 제 집을 짓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우리와 함께 살아가니까요.

선배님, 아직 깨어 계세요?
혹시 밤의 망토를 덮고 누워 저와의 만남을 돌이켜보시는 중인가요?
혹 제 얼굴이 잘못 그린 그림 같다고 지우려 애쓰고 계시지나 않는지요? 흘러간 시간에 비해 성장이 느린 아이야, 혀를 차고 계신 건 아닌지요?

아무래도 좋으니 “괜히 만났어,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 결론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래 느린 아이인데다 이일 저일 발목 잡히다 보니 아직 여기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배님, 아직 사랑을 거두진 말아주세요. 걸음은 느리지만 오늘과 내일, 남아 있는 나날 동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겠습니다. 다음 번 눈 앞에서 사라질 때쯤엔 선배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방이라도 하나 남기고 싶으니까요.

선배님 시간은 혼자 계셔도 꽉 찬 시간일 터, 어리석은 후배를 만나주시고 말 아닌 말, 들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지금은 선배님 발자국 따라 걷고 있지만 언젠가 저도 선배님처럼 잎 무성한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저처럼 느리게 자라는 후배가 지친 마음 내려 놓을, 그런 그늘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부디 그날까지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