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섬진강 나룻배 (2007년 3월 29일)

divicom 2009. 11. 16. 23:56

광양군 다압면은 조그만 마을이지만 그곳엔 꽉 찬 것과 텅 빈 것이 함께 있습니다. 희고 붉은 매화향에 취한 동네는 밤에도 잠들지 못하지만 길아래 섬진강은 텅 비어 한낮에도 달의 울음 소리가 들릴 것 같습니다. 꽃 그늘마다 사람들이 일렁이니 오히려 발을 돌려 강가로 내려 갑니다.
 
    봄 바람이 흔드는 건 사람의 마음만이 아닙니다. 줄에 묶인 나룻배도 멀리 가지 못하는 몸을 자꾸 흔들고 섰습니다. 배의 이름은 “동승”이지만 동승한 사람도 아기 중도 없이 텅 비어 있습니다. 큰 울음으로 왜구를 쫓고 강 이름에 두꺼비 “섬(蟾)” 자를 넣게 했다는 두꺼비들도 모두 매화 구경을 갔는지 강의 숨소리뿐입니다.
 
    빈 것을 보면 채우려 하는 관성이 동승호에 추억을 싣습니다. 처음 만난 날 당신과 내가 동승했던 송도호의 작은 배가 생각나고, 길 찾는, 혹은 길 잃은 이들을 나르는 바수데바의 대나무 뗏목도 생각납니다. 내 손에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를 들려준 사람이 당신이니 바수데바를 생각함 또한 당신을 생각하는 일이겠지요.
 
    그날 당신은 호수 위에 뜬 달을 먼저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 머리 위에 뜬 달, 당신에겐 보이지 않을 테니 내 눈 속 달을 보시지요.”
 
    영민한 귀엔 유치하게 들렸을 그 구절이 어리석은 제 귀엔 송강 (松江)의 시만큼 아름다워 달도 보기 전에 잠시 아찔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뱃머리를 돌려 주어 당신 본 달이 내 눈 속으로 들어올 땐 또 한번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동승은 시작되었지요.
 
    끝없이 책을 읽는 내게 당신이 말했습니다. 
    “왜 책을 많이 보아야 하나요?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되는 거 아닐까요?”
 
    당신이 말한 한 권은 헷세의 “싯다르타”였습니다. 헷세를 읽느라 잠을 설치던 젊은 날에도 “싯다르타”엔 별로 마음이 끌리지 않았었지요. 고타마 싯다르타 얘기겠지 하는 잘못된 지레 짐작 탓이 컸습니다.
 
    강물 같은 시간이 도와 노랗게 바랜 “싯다르타”를 집어 들었습니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바수데바의 뗏목이 보이고 그가 모든 것을 배워온 강, 무엇보다 강을 닮은 그의 침묵과 경청(傾聽)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제일 부족한 것이 침묵과 경청이라 그렇겠지요. 

    강은 모든 걸 가르쳐 주지만 무언가를 찾아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에겐 한낱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바수데바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리 없이 웃으며 당신의 작은 배에 나의 동승을 허락할 때 당신도 바수데바처럼 알고 있었겠지요. 언젠가 내가 인도 청년 싯다르타처럼 떠났던 곳으로 돌아 오리라는 걸.
 
    매화는 제 흥에 겨워 등지고 선 사람에게도 향기를 보내지만 다리는 섬진을 향해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다리를 부리던 시절은 가고 어느덧 다리가 마음의 고삐를 쥐고 있습니다. 다리가 시키는 대로 강바람에 눈을 씻으며 생각합니다. 

    무엇을 찾아 떠나는 사람에게 바수데바처럼, 아니 당신처럼 말없이 길을 안내하리라, 언젠가 긴 여정에 지친 그가 돌아올 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옆자리를 내어주리라.
 
    그런데… 혹 보셨나요? 열 다섯 시간 노독에 반쯤 감긴 내 눈 속, 무엇이 있던가요? 매화? 바람? 나룻배? 섬진도 아름답고 매화도 현란하지만 잠깐 졸다 깨어보니 어느새 당신 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