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敵)'은 '해를 끼치는 요소' 또는 '승부를 겨루는 상대편'을
뜻합니다. 공적으로 노년에 들어선 지금 저의 첫 번째 적은
저 자신입니다.
자고 일어나 옷을 갈아입는 순간부터 제가 저를 괴롭힙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입을 옷을 꺼내놓았어야 하는데
꺼내놓지 않아 짜증이 날 때가 있고, 옷을 벗고 입는 단순한
일을 수행하는 손이 둔해진 것을 느끼며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부엌에서 일하다 양파를 가지러 베란다에 가서는 베란다
빨랫줄의 빨래만 걷고 빈손으로 올 때가 있는가 하면,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해 베란다를
청소한 후 판판하게 펼쳐 널어야지 하고 빨랫줄 한쪽에
걸쳐 놓았던 손수건을 그냥 두고 올 때도 있습니다.
오래 산 집인데도 집안에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조금만 오래 서서 일해도 발바닥이 뜨거워집니다.
핸드폰 문자를 찍다 보면 잘못 찍기 일쑤이고 PC에 글을 쓰다
보면 키보드를 잘못 눌러 엉뚱한 글자가 나타나곤 합니다.
이 다양한 적들과 겨루며 사는 일은 끊임없이 짜증을
자아내는데, 짜증을 해소하려면 짜증을 일으키는 일들의
사소함을 깨닫고 제가 이미 삶의 한가운데를 떠나 죽음을
향한 행로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피식! 웃게 되고 제가 겪고 있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그 변화가 수반하는 자연스러운 퇴행을 즐겁게
비웃는 한편 퇴행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게 되고
안도하게 됩니다.
왜 안도하느냐고요? 그건 이 퇴행이 제가 자연의 일부이자
인류의 일원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동행들과 함께 끝없는 생로병사의 여로를 걷는 저는
마침내 유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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