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선(善)은 진화하고 악(惡)은 진화하지 않았으면,
선인의 수는 늘고 악인의 수는 늘지 않았으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나은 곳이 되었을까...
이것은 소용없는 혹은 어리석은 가정입니다.
역사는 이미 선과 악이 함께 진화했음을 증명하니까요.
그래도 아직은 선인이 악인보다 많을 겁니다.
악이 선보다 수적으로, 혹은 양적으로 적다 보니
악이 더 큰 글씨로 기록되는 것이겠지요.
전쟁으로 병든 문명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인류가 축적한 전쟁의 비열함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먼저 역사상 가장 긴 체제였던 왕권국가들이 취했던 약육강식의 전쟁이다. 세계 대다수의 국가가 민주국가로 전환되었음에도 그 악습이 유전되고 있다. 국가의 민주주의는 있지만 여전히 세계의 민주주의는 없다. 유엔은 몇몇 강대국의 독점 연합일 뿐, 그들과 이해관계를 맺지 않는 약소국가에는 무의미한 곳이다. 미국이 파나마나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거의 모든 나라들이 침묵을 지켰다.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때부터 보여준 것처럼 진영 싸움이 되고 있다. 비록 유엔총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러시아의 침략을 비판했지만, 냉전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와 서방세계의 대결임은 자명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나토 회원국가들이 도와주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그들의 이념인 자유주의의 최전방이기 때문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된 우크라이나는 서쪽 진영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에서 극도의 잔혹함을 드러낸 대량 학살과 원폭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후자는 화학전과 함께 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민간인 학살의 목적은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것으로 전쟁의 몰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통과 증오, 원한과 복수는 뿌리 깊숙이 악순환되고 있다. 인류사에서 전쟁이 멈춘 적은 거의 없다.
결국 19세기 말 중국의 불교혁명가 탄스퉁(譚嗣同)이 사회진화론에 대해 “선도 진화하지만 악도 진화한다”고 한 탁견이 증명되고 있다. 평화도 전진하고 있지만 전쟁도 전진하고 있다. 그 정점에 있는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러시아처럼 이웃나라를 침략했을 때, 세계는 과연 이를 막아낼 수 있을까. ‘너 죽고 나 죽자’는 핵무기의 시그널은 인류의 집단자살을 볼모로 삼은 광기의 극치다. 인간의 지성은 여기에서 한계에 봉착했다. 문명은 폭력을 줄여온 것이 아니라 확대 재생산해왔음을 지금의 무도한 현실이 폭로하고 있다. 문명은 폭력에 의지한 허약한 구조물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 전쟁의 무자비함은 국가와 과학의 담합으로 극대화된다. 전자는 폭력의 원천이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이상률 옮김)에서 “국가란 일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자신에게 요구하는 인간공동체”라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동안 이 나라 안에서 일어난 국가권력의 횡포만 봐도 알 수 있다. 권력의 독점은 폭력마저 전횡하여 젊은이들의 힘을 유린하고, 힘없는 백성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는다. 권력도 그렇지만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유동하는 국가의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 지구상에서 천년을 넘긴 나라가 몇이나 되나.
또한 과학은 인간의 폭력을 증폭시켜준다. 자신과는 거리가 먼, 비명도 들리지 않는 곳을 향해 버튼만 누르면 된다. 인간은 근대 이후 과학의 발전과 함께 신이 되었다. 문명을 끊임없이 붕괴, 해체시키고 다시 구축한다. 무한대로 확장한 허상의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편을 가르고 적대시하는 분열된 의식으로 죽을 때까지 죄다 밟아보지도 못할 영토 확장에 매몰되어 환호한다. 제국은 이러한 욕망의 대명사다. 전쟁은 일으키는 자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영혼의 암세포다. 지구 위의 모든 존재는 불가분의 공생 관계로 얽혀있다. 이웃을 고통에 빠뜨린 만큼 업보로 환원된다. 우크라이나의 파괴는 러시아의 몰락이다.
푸틴은 영토의 제국 외에 또 다른 제국을 상상하지 못한다. 문학과 음악과 춤의 제국이 러시아 아니던가. 톨스토이는 세계인들이 흠모하는 러시아 문학의 대표인 동시에 평화의 상징이다. 그는 러시아가 패배한 크림전쟁에 참전했다. 그 경험에 기반해 쓴 <세바스토폴 이야기>에서 전쟁은 피와 고통, 그리고 죽임으로 뒤덮이는 현실임을 고발한다. 전쟁에 대해 “인간의 이성과 본성에 위배되는 사건”이라고 한다. 교회와 사유재산과 국가를 부정한 이유는 오직 폭력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박형규 옮김)에서 보로디노 전투의 사상자들 위로 흩뿌리는 비를 보며, “이제 충분하다, 충분하다, 인간들아. 그만둬라 …… 정신 차리란 말이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한다. 하루빨리 러시아가 헛된 미몽에서 깨어나 세계의 존중을 받는 참된 인간존엄의 제국이 되길 기원할 뿐이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32603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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