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인가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는 '선진' 일본을 보았습니다.
내 생전에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일본이 왜 이러지?'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국익으로 인권을 지우는 행태가 계속되며 일본은 이제 '떠오르는 해(욱일: 旭日)'가
아니고, '지는 해(석일: 夕日)'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이 소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야기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경향의 눈]일본의 ‘국민 버리기’ 작전
일본인들은 ‘미즈기와(水際·물가) 대책’으로 불리는 일본 정부의 대응방침에 안심했을 것이다. 해안을 경계로 방어선을 쳐 코로나19의 상륙을 막겠다는 ‘쇄국(鎖國)작전’은 섬나라에 익숙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나라의 안전을 지키고 평화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런 대처법은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예측불허의 리스크가 커지는 글로벌 시대엔 잘 먹히지 않는다. 더구나 경직된 거버넌스(통치구조)와 결합할 경우 ‘기능부전’에 빠지기 십상이다.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대한 미즈기와 작전은 일본형 시스템의 난맥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프린세스호에 대해 2주간 봉쇄조치를 내렸을 때 아베 신조 정부는 이 배가 거대한 ‘바이러스 배양접시’가 될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탑승자 3700명을 모두 하선시켜 전수조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아베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대책본부의 ‘매뉴얼’에는 빠졌다. 그렇게 한번 대책의 틀이 짜이다 보니 밀폐된 선내에서 감염이 급속히 번졌는데도 대응은 더뎠다. 초기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보니 대책의 틀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 찔끔거리다 화를 키운 것이다. 일본 정부가 애초부터 나쁜 마음을 품었을 리는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사람의 안전’은 물가 저편에서 실종됐다. 크루즈선 환자는 ‘일본 내 감염자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얄팍한 생각도 일을 그르치게 했다. 아베 총리의 최대 관심사는 도쿄 올림픽이 영향받지 않도록 ‘일본 내 감염자 수’를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크루즈선 사태는 나라가 1000명이 넘는 자국민의 안전을 팽개치는 ‘기민(棄民)’사태로 확대됐다. 급기야 각국 정부가 비행기를 띄워 자국민 구출에 나서고, 올림픽을 5개월 앞둔 일본은 ‘방역 후진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그간 일본의 ‘미즈기와 대책’은 반드시 ‘기민’을 동반하곤 했다. 경제의 거품이 꺼진 뒤 2000년대 빈곤층이 급증하자 일본 정부는 생활보호 신청자가 급증하지 않도록 신청 단계에서 막았다. 노모의 치매를 돌보느라 파견사원 일을 그만둔 54세 남성이 생활보호를 받기 위해 2005년 7~8월 세차례나 교토시 복지사무소를 찾아갔으나 핀잔만 받았다. 막다른 처지에 몰린 남성이 노모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비극을 불렀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1년도 채 안돼 일본 정부는 피폭 우려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을 귀환시키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후쿠시마현 전체를 방사선관리구역으로 지정하고 ‘무인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묵살됐다.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대 미나마타병 사태 때도 일본 정부는 줄곧 기업편을 들다가 10년이 지나서야 공장폐수가 원인임을 인정했다. 위기 때마다 정부는 방어선을 치고, 약자들을 그 너머에 내다 버렸던 것이다.
전후 경제성장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형 시스템과 매뉴얼은 정밀함에선 세계적 수준이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은 빈약했다.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시대의 다양한 위험과 도전들을 감당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호황기의 풍요함에 가려진 시스템의 결함이 헤이세이(1989~2019년) 30년간 표면화되면서 일본은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물론 전환의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1980년대 말 여성 대표 도이 다카코가 국민적 인기를 얻었을 당시 사회당이 노동조합에 의존하던 체질에서 벗어나 젠더와 지역, 세대 등으로 영역을 넓혔더라면 일본 정치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탈원전’의 열망을 지렛대로, 일본을 안전·여성·생태의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로 바꿔나갈 기회도 있었다. 이런 찬스들을 놓치면서 일본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감수성을 키우지 못한 채 ‘열화(劣化)’해갔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일본 내 여론조사에서 70%가 승객들을 하선시키지 말라고 응답했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승객의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풍조는 일본 정부의 ‘기민’적 태도가 사람들에 내면화됐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일본은 예전 우리가 알던 선진국에서 ‘위험사회’로 퇴행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한국 정부의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6년 전 벌어진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 ‘미즈기와’와 ‘기민’은 한국에서도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하루 2~3명꼴로 사람이 산재로 죽어가며, 외국인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 크루즈선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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