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 때(2018년 4월 15일)

divicom 2018. 4. 15. 11:15

몸이 편치 않을 때는 입을 열고 싶지가 않습니다. 

입을 닫고 눈을 감고 있으면 시나브로 몸 안에 기운이 모이는 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편치 않은 몸으로 외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책을 한 권 들고 가 눈을 그것에 고정시킵니다.

여러 가지를 보는 것은 에너지를 쓰는 일이니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에너지의 소모를 최소화하는 것이지요.


엊그제도 그랬습니다.

꽤 오래 지하철을 탈 일이 있어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의 시 모음집을 들고 갔습니다.

흰머리 덕에 경로석에 앉아 시를 읽었습니다. 

세 명이 앉는 경로석 한가운데가 제 자리였습니다.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영시를 읽으시네요!"

아무 말도 하기 싫었지만 저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분 같아 

예의를 차리느라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미소를 띠고 말했습니다. 

"영국 시인 중에 누구를 제일 좋아해요?"


혐오감 같은 게 확 밀려왔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제 몸이 편치 않아 아무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상태라는 것,

책을 읽는 이유도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는 것,

몸이 좋을 때도 모르는 사람과 한담을 나누는 걸 싫어한다는 것 등을 모르는 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청한 것이겠지요.


무슨 말을 해야 예의를 지키면서 다시는 그 사람이 제게 말을 걸지 못하게 할까

생각하기 전에, 한마디가 제 입을 벗어났습니다. "몰라요."

"몰라요?"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네, 아무도 몰라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기분이 나쁜 것 같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제 왼쪽에 앉았던 사람이 내렸고 저는 그 자리로 옮겼습니다.


눈으론 여전히 책을 보았지만 조금 전처럼 집중이 되진 않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조금 친절하게 대꾸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조금이라도 친절했으면 그 사람은 계속 얘기하려 했을 테니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사람이 내렸고 몇 정거장 더 가서 저도 내렸습니다.

그날 읽은 시 중에 'The Broken Heart(부서진 마음)'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는데

그 중에도 이 구절이 특히 기억납니다.


"I brought a heart into the room,

 But from the room, I carried none with me;"

"그 방에 들어갈 땐 심장 하나를 들고 갔는데

나올 때는 빈손이었네."


집에 오는 길에도 지하철을 타서 존 던의 시를 펼쳤습니다.

막 여든이 되신 여자분--그분이 옆 사람과 하는 얘기를 듣고 알았습니다--이

물었습니다. "아이고, 그 작은 글씨가 보여요? 눈이 참 좋으신가봐."

제 눈은 초고도근시이지만 "네"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얘기가 길어질 테니까요.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상대의 답변이나 반응이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묻는 사람에게 묻는 이유가 있듯

답하는 사람에겐 그렇게 답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