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즐거운 산책

비, 제헌절, 수박, 양배추 (2017년 7월 16일)

divicom 2017. 7. 16. 17:28

밤새 빗소리에 잠을 설쳤지만 그래도 목마른 대지에는 고마운 비,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2년 만에 290 밀리미터의 '물 폭탄'을 맞은 청주에서는 하천이 범람하고 곳곳이 침수되었으니

새삼 '과유불급'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일은 제헌절, 이 나라의 헌법이 처음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입니다. 국경일 중에서 공휴일이 아닌 날은 제헌절뿐이라고 하는데,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헌법을 자주 들먹이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지난 겨울 촛불 

집회를 비롯해 민주화를 위해 열리는 집회에서는 늘 헌법의 첫 문장들을 외쳐야 했습니다. 대통령이 누군지 모르고, 내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지, 시장이 누군지 모르고도 잘 살 수 있으면 살 만한 사회라는 말이 있듯, 헌법을 모르고도 살 수 있으면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엊그제 외출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제 또래 남자 하나가 작은 태극기 두 개를 들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잠시 조용하던 남자는 곧 대통령의 이름을 들먹이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로 듣고 가끔 

스쳐 보던 '태극기 부대'의 실체...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그는 원자력발전소 건설 중단에 대해서도 온갖 욕을 동원해서 비판했는데, 그를 보니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며,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건강해 보이는 그의 몸을 채우고 있는 무지와 투지, 그리고 외로움... 

그를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다니니 태극기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내일 아침엔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으로 만든 헌법의 탄생을 기념해 태극기를 걸어야겠지요.  


오늘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tbs FM95.1)'의 첫 노래는 어린이들이 부르는 '제헌절 노래'였습니다. 

'옛길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리라' 하는 노랫말을 들으니 여러 번 고쳐진 우리 헌법이 떠올랐습니다. 나라와 시대의 변화에 '새 걸음으로 발맞추'기 위한 개헌이었는지, 특정인이나 특정 정당이나 특정 세력을 위한 개헌이었는지 

생각하니 착잡했습니다.


이달 초에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일곱 명의 태평양전쟁 당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2년 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있는 수많은 필름을 뒤져서 찾아냈다는 이 영상이 위안부의 실체를 증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건 당연하겠지요. 1944년 9월 태평양전쟁 막바지 중국 쑹산에서 미중 연합군으로 활동하던 미군사진대 소속 군인이 촬영한 18초짜리 흑백 영상. 그 영상 속 포로로 잡힌 위안부 일곱 명의 모습...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가 되풀이 된다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박혜은 맥스무비 편집장과 함께 하는 '영화 읽기'에서는 7월 13일에 개막해 23일까지 이어지는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 중 여섯 편을 소개했습니다. 이용승 감독의 '7호실'은 신자유주의시대의 약자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블랙코미디인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616명의 투자자가 모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터넷과 SNS에 넘쳐 흐르는 사생활과 그것을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21세기형 노출증, 박 편집장에 따르면 

영화 '끊지 마'는 이 두 종류의 광기가 결합할 때 태어나는 공포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로버트 모클러 감독의 

'관종'도 SNS 공포를 다룬 영화인데,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엽기적 행각을 서슴지 않는 세태를 고발하는 영화라고 합니다. 이 밖에도 '해피 헌팅', '플레이스' ,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어 '고전'으로 자리잡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60년 영화 '사이코'를 소개해드렸습니다. 


권태현 출판평론가와 함께 하는 '책방 산책'에서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와, 에머런 

메이어의 <더 커넥션>을 소개했습니다. 철학자 가브리엘이 쓴 책은 얼핏 어려울 것 같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권태현 출판평론가의 말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의미장에서 의미장으로 끊임없이 넘어가는 변환이며 의미장들의 융합이자 맞물림'이라고 얘기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나의 왼손이 몸이라는 의미장에 놓이면 신체를 이루는 일부로 나타나고, 화가의 작업실 모델이라는 의미장에 놓이면 예술작품으로 나타나고, 점심을 먹을 때는 음식을 뜨는 도구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어려워보이지만 어렵지 않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내는 비결은 처음의 '어려워보이는' 인상을 모른 채 하고 묵묵히 읽어가는 것이겠지요.


<더 커넥션>의 부제는 '뇌와 장의 은밀한 대화'라고 합니다. 장이 '제2의 뇌'라는 주장은 꽤 오래 전에 나왔는데, 

40년간 뇌와 몸의 관계를 연구한 의학박사 메이어 씨는 특히 뇌와 장의 긴밀하고 원활한 소통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권태현 평론가가 요약한 내용에 따르면, 출생 후 36개월 정도면 우리의 장내 미생물군이 다 갖추어지는데, 이 시기에 잘못 먹거나, 항생제를 남용하거나, 관장을 자주하거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미생물군 조성에 문제가 생겨서 질병에 잘 걸리는 체질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성인이 된 후 동물성 지방이나 첨가물이 많이 든 음식을 많이 섭취하거나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장내 미생물군이 점점 더 약해지고, 이럴 경우 장 질환뿐만 아니라,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과 같은 뇌 질환에도 걸릴 수 있으니, 되도록 동물성 지방을 멀리하고 발효식품을 가까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 중엔 '고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메이어 박사의 조언에 귀기울여 고치기 힘든 질환을 피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문화가 산책'에서 소개한 행사 중엔 국내 최대 만화축제인 '부천 국제만화축제'가 있었습니다. 19일부터 23일까지 부천 일대에서 열린다니 형편이 되면 가보고 싶습니다. 


'즐거운 산책...' 말미에 소개해드린 우리말은 '수박하다'였습니다. '수박'하면 여름에 먹는 '수박'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 '수박'은 '수'의 발음이 길어 '수:박'으로 발음되지만, '수박하다'의 '수'는 짧게 발음합니다. 

'수박하다'는 동사로 '사람이 무엇을 붙잡아 묶다' 또는 '사람이 무엇을 주먹으로 치다'를 뜻합니다. 가끔 떠나려는 애인을 수박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그나마 남아 있던 정까지 떼게 되니 그러지 않는 게 좋겠지요. 

아래에 '들여다보기'에서 읽어드린 제 글 '고마운 양배추'를 옮겨둡니다. 오늘 들려드린 노래의 명단은 tbs 홈페이지

'즐거운 산책...' 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마운 양배추

 

찬 것을 자주 먹어 탈이 났는지

소화도 잘 되지 않고 입맛도 없습니다.

상큼한 새 김치를 먹으면 입맛이 돌아올 것 같지만

배추와 무는 맛은 가을만 못하고 값은 비쌉니다.

 

채소가게를 둘러보니 한손으로는 들기도 힘든

튼실한 양배추가 한 통에 이천오백 원,

커피 한 잔 값도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양배추는 항암식품이고

소화불량에도 좋다고 하지요.

 

양배추 대여섯 장을 오이, 양파와 살짝 절여뒀다가

고춧가루, 마늘, 식초를 넣고 버무리니

금세 김치가 됩니다.

 

김치를 담그고도 양배추는 많이 남았습니다.

양배추를 넣어 된장국을 끓여야겠습니다.

된장국에 새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입맛도 돌아오고 소화도 잘 될 것 같습니다.

주머니속 사정과 몸속 사정, 두루 봐주는 양배추,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