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오랜만에 남산 기슭 '문학의 집' 카페에 들러 책을 읽었습니다. <장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
(Mon premier voyage (Around the World in 80 Days)>, 예담 출판, 이세진 번역.
이 여행기는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프랑스 예술가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가
같은 프랑스의 작가 쥘 베른(1828-1905)의 소설<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고, 베른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와
하인 파스파르투가 했던 여행을 다시 하며 쓴 여행기입니다.
콕토는 친구 마르셀 킬을 '파스파르투'로 이름 짓고 1936년 3월 28일 함께 여행길에 올랐으며, 이 책은 이듬해
출간됐습니다. 1장 이탈리아에서 이집트로의 여행, 2장 인도에서 싱가포르까지, 3장 신비의 동양을 거쳐,
4장 미국에서의 마지막 여정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콕토의 책에서 몇 구절 인용하고 그 문장이 제게 준 느낌을
덧붙입니다.
* * *
목차와 서문 사이:
지구는 그 모든 오랜 상처들로 인해 전사의 얼굴에서 풍겨나는 바로 그러한 매력을 지닌다.
(사람도 지구처럼 많은 일을 겪어야 매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조금 겪고도 스스로 많이 겪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겪은 사람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됩니다.)
27쪽:
민족혼은 결코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 혼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라인드를 내린 궁전의 적막함
뒤에서, 로마의 제복과 기강 뒤에서, 무솔리니 수상의 코믹하고도 비극적인 가면 뒤에 숨어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로마의 혼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여행자들도 한국 정치의 '코믹하고도 비극적인 가면 뒤에 숨어' 있는 '한국의 혼'을
볼 수 있을까요?)
39쪽:
사진이나 언어적인 묘사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수없이 많은 곳으로 긴 여행을 한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것... 그들이 사진과 언어적 묘사에 열을
올리는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67쪽:
스핑크스는 수수께끼가 아니다. 질문은 필요없다. 오히려 스핑크스는 하나의 대답이다. 스핑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에서 무덤을 지키며 서 있노라. 무덤이 온전한지 텅 비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름다움을 향한 의지, 재능의 불꽃, 인간불사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불사른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심지어 파괴에서조차 새 힘을 얻으리라. 우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참된 정신을 불러모으는 이 세상의 지표들이니, 믿음이 사라지고 속도가 끈덕지게 방해할지언정 이 정신들이 성스러운 순례와
체류를 하게 하노라."
('속도'라는 건 참으로 끈질긴 훼방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지하고 제압하려 애쓰는 대신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세상이 자꾸 악화되는 것이겠지요.)
363쪽: 세계일주는 진열장에 나와 있는 불건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 중에서 맨 위에 있는 것들뿐이다.
('여행'이 무엇인가를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여행은 타국과 타인의 삶을 보는 것임과
동시에 그들에 대해 '오해'하게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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