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오랜만에 탐라YLA에서 함께했던 교수님들을 만났습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맑음을 유지하시는 분들을 뵈니
기뻤습니다. 어제 모임을 위해 애써주신 이찬웅 교수님께 특히 감사합니다.
어제 참석한 분들 중에는 신문사 선배이신 문창재 교수님도 계셨습니다. 최근에 목포에 다녀오신 얘기를 해주시며 이난영 씨의 '목포의 눈물'에 얽힌 슬픈 비화를 들려주셨습니다. 문 선배님이 '말코글방'에 올리신 글을 이찬웅 교수님 편에 받았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되새기며 다시는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는 일이 없게 마음을 다졌으면 좋겠는데, 삼일절인 오늘 태극기를 내건 집이 너무나 적네요...
삼일절이 어떤 날인지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무슨 날인지는 알지만 태극기만 걸지 않은 걸까요?
* * *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한국일보 논설실장, 편집局次長, 駐도쿄특파원, 외신부장 역임
저서로 <證言> <나는 戰犯이 아니다> 등이 있음.
목포의 눈물
아무 생각 없이 불러 제켰던 노래 ‘목포의 눈물’에 진짜 눈물이 배어 있는지 몰랐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목포의 애국가’ ‘한민족의 노래’라는 별명이 붙은 목포의 눈물 2절 가사에
식민지 백성의 저항과 비애가 새겨진 걸 몰랐으니, 헛되이 산 세월이 부끄러웠다.
봄 마중 여행지가 남도로 잡혀 하룻저녁 한나절 일정을 소화한 주말 곧바로 달려간 곳이 유달산이었다.
자주 갈 수 없는 땅이지만 갈 때마다 올라보고팠던 곳이다. 유달산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이등바위로 올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고하도에 걸린 목포대교와 다도해 풍광에 취하여 일등바위를 넘었다.
바위길 능선을 타고 구도심지로 내려오는 길에 이난영 노래비를 본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삼백연 원안풍은 로적봉 밋헤
님 자최 완연하다 애닯은 정조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비면에 새겨진 취입 당시의 노랫말 2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삼백연(三栢淵)과 원안풍(願安風)이 무언가 궁금하였으나 광복 후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을 뿐이었다.
궁금증을 이길 길 없어 돌아와 취재해 보았더니 그 사연은 비탄 덩어리였다.
다시는 들어볼 수 없는, 촉촉하고 애절한 목소리의 이난영을 세상에 알린 그 노래는 탄생부터가
기구하였다. 그 때문에 더 유명세가 붙어 일세를 풍미한 노래다.
1935년 오케이 레코드가 조선일보 후원으로 개최한 조선 6대도시 향토찬가 노랫말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무명시인 문일석의 작품에 손목인 작사로 노래가 나오자마자 시끄러웠다.
일제 경찰 고등계는 ‘삼백년 원한 품은 로적봉’을 문제 삼았다.
명량대첩 후 고하도에 진을 친 충무공이 왜군과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유달산 자락 노적봉을 군량미 낟가리처럼 위장하여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는 고사를 그들이 알았을까.
건곤일척 진을 뺀 명량해전 후 양 진영은 군량부족의 시름이 깊었던 때다.
충무공은 영산강에 석회와 백토를 풀도록 지시하였다.
노적봉 낟가리를 본 왜군은 영산강하구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허연 물을 쌀뜨물로 알고 겁을 먹었다.
군량이 부족한 터에 무모한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제풀에 겁을 먹고 도망쳐 갔다.
작사자 작곡자 레코드사 관계자가 붙잡혀가는 소동 끝에,
‘백두산 아래 삼백연의 안녕을 비는 바람’ 식으로 문일석이 찍어 붙여
공식가사를 그렇게 인쇄해 제출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키울수록 손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고등계가 눈을 감아 버리자, 이 노래는 폭풍을 일으켰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5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모르는 사람들은 분위기를 타고 이 노래에 맹목적인 사랑이 실렸다.
이난영은 ‘삼백연 원안풍’으로 노래하지 않았다.
당시의 레코드 녹음을 몇 번이나 들어 보아도 분명히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로 시작되는 1절은 가신님을 그리는 남녀 간 연모의 정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2절에는 충무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충무공 순국 300년을 맞아 노적봉에 임의 자취가 더 뚜렷하다는 것과,
나라 잃은 백성들이 그 임을 그려 우는 정을 담고 있지 않은가.
노래의 비극처럼 작사가도 가수도 행복하지 못 했던 인생역정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목포 출신으로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 유학생 출신인 문일석은 자신의 노래가 그렇게 ‘호강’하는데도,
함경도 탄광촌을 전전하다 불우하게 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불우하게 자란 이난영은 이 노래 하나로 가요계의 신데렐라가 되었지만,
결혼생활이 불우하였다. 첫 남편과 사별 후 남인수와 재혼으로 맺어졌지만 그마저 오래 살지 못 하였다.
아홉 남매를 키우기에 크게 고생하였다 한다. 어머니의 인자를 물려받은 김 시스터즈, 김 브러더즈가
우리 귀에 익숙한 가수가 되었던 사실 하나가 위안이 되었을까.
이제부터는 2절 없이는 이 노래를 입에 담지 않을 작정이다.
그 애절한 비음과 음정의 곡예비행을 흉내 낼 수는 없어도, ‘삼백년 원한’만은 분명히 발음하여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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